Jihyun Jung

대화에 관한 이야기: 반복적 혹은 분절된 대화

대화에 관한 이야기: 반복적 혹은 분절된 대화

맹지영(두산갤러리 큐레이터)

 

나의 언어는 두 작가의 대화 뒤편에 존재하도록 한다.

 

흔히 대화란 나와 상대의 생각이나 감정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어쩌면 대화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서로 자신의 문장을 늘어 놓으며 팽팽하고 평행하게 한 방향으로 내달리는 것이거나 상대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앵무새처럼 재연하는 것일 지도.

작가 크리스티안 볼탕스키와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대화 중에서 흥미로운 견해가 있었다. 대화를 통해 항상 같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종종 새로운 대화의 내용을 만드는 계기로 작동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기 두 작가, 이형구, 정지현의 ‘대화’는 결코 만나지 않는 평행선을 그리며 달려가는 것 같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같은 공간을 잠시 공유하고 서로의 리듬에 반응하여 굴절된다. 이들은 일상 속에서 인식세계의 관문을 통과하는 모든 신호들을 감지하고 출력하는 반복적인 행위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여기서 파생된 (비)의도적 균열을 통해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유보하며 지속적인 사전연습을 하고 있었다. 내 언어가 자리하는 곳은, 두 작가의 작품 세계 사이 어딘가에서 두 세계가 교차하는 그 순간에 있다. 그 반복적이고 (불)규칙적인 운동이 분절되는 순간의 틈을, 움직임이 잠시 멈춘 그 사이에서 질문을 던지고 목격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맹지영)

 

 

 

순리대로 공을 받아넘기는 방법은

네트가 거울이라 생각하고 상대의 모션과 역으로 하여

라켓의 진행 방향이 거울에서 일치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거울 앞에서 내가 오른손으로 앞을 찌르면

거울 안의 나는 왼손으로 찌르는 것처럼

상대의 라켓 각도와 회전 방향 그리고 라켓의 진행방향을

역으로 진행시키는 것으로 먼저 그림을 그려보세요.

어떻게 하면 네트에서 상대의 운동과 역으로

그리고 일치되게 스윙하는 것인지를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탁구 스핀 서브 받는 방법/출처: 네이버 지식 in

 

맹지영: 반복

정지현: 매일 강가에 나가 물결을 기록하겠다며 연필선 만을 가득 채운 백여 장의 종이들이 있다. 또 지난 몇 달간 손가락 지문을 뜬 고무 껍질들이 한쪽에 쌓여 있다. 이들은 여전히 무용해 보일 때가 많지만 때때로 이런 행위들이 이유를 필요로 하는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하나의 좋은 수단이 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이들은 다른 사물들에 비해 결코 가벼워 보이지도 않았고 그 형태가 다소 간결하거나 허점투성이여도 어느 위치에나 쉽게 놓일 수 있었다. 마치 내재된 임의적인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이형구: 조각의 작업과정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좌우대칭’에 대한 얽매임, 데자뷰, 꿈의 해석과 예지몽, 별자리와 12지신, 뫼비우스의 띠보다는 클라인의 항아리(Klein Bottle), 부채(debt)의 메커니즘

 

 

맹지영: 걷기

이형구: <M.M Ω=120>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라데츠키 행진곡을 떠올리며……연희동으로 향하여 안산을 넘어가본다. 서대문에서 시청을 거쳐 을지로까지, 종로에서 광화문까지, 사간동에서 그림구경, 그리고 사직터널을 통과하여 신촌으로. 걷고 걷고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새 다섯 시간이 지나 있다.

머리가 맑아진다.

정지현: 그런데 이상하게도 목적 없이 걷기란 쉽지가 않다. 우리 동네에는 이미 그런 어르신들이 많아 보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맹지영: 관찰

정지현: 세상의 한쪽에 서서 일상의 한 지점을 꾸준히 바라본다는 것의 가치는 사적인 사건과 공적인 것 사이의 경중을 가리기 위함이라기보다 얼마만큼 그 순간을 기억하고 매만지느냐에 따라 그 빛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이형구: 오후 4시경 지하철을 탔다. 한양대 역이었을까? 점퍼 차림에 이어폰을 낀 50대 중반 남자의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움직임이 신경이 쓰인다. 그다지 혼잡하지 않던 열차 안에서 묘한 스텝으로 2-3미터의 거리를 왕복하는 그의 모습은 작업실에서 걸음걸이(Passage → Piaffe → Passage → Half Pirouette)를 연습하는 나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핸드폰으로 도촬 하고픈 욕구가 솟구쳤다. 그의 행위는 홍대 입구역에 내가 내릴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2014. 5. 20)

 

 

맹지영: 리듬

정지현: 등 뒤로 발톱을 깎는 소리가 들린다.

사이의 공간이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다.

같은 발가락에 머무는 시간과

다음 발가락으로 넘어가는 시간

조절의 시간과 깎이는 순간

그러다 조금 긴 정적으로 끝났나 싶을 때면 다시

이형구: 수직에서 수평, 세로에서 가로, 왼쪽에서 오른쪽, 북동에서 서남, 공간에서 시간.

 

 

맹지영: 소리

정지현:

– — – ···· · ·-·
·· — ·· ··· ··· -·– — ··-

 

이형구: 하나둘삼넷오여섯칠팔아홉공공아홉팔칠여섯오넷삼둘하나

 

 

맹지영: 훈련/조련

이형구: 입장(Enter), 수축구보(Collected Canter), 정지(halt), 수축속보(Collected Trot), 신장속보(Extended Trot), 하프패스(Half-Pass), 후진(Rein Back), 빠사지(Passage), 삐아뻬(Piaffe), 신장평보(Extended Walk), 수축평보(Collected Walk), 신장구보(Extended Canter), 답보변환(Flying Change of Leg), 삐루엣(Pirouette)

정지현: 15분마다 해안의 어떤 배가 얼마의 속도로 또 어디로 향하는지 보고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던 시절이 있었다. 창문 하나 없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실내공간에서 들려오는 것은 주위의 전자망 소리뿐이었고 레이더 상 검은 화면의 녹색 점들은 실시간으로 바깥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처음 레이더의 스크린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그 화면이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지 알리 만무할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그 화면에 익숙해질수록 작은 점들-녹색 도트-의 크기만으로도 어떤 종류의 배인지 단박에 알 수 있게 되고 조금 더 숙련되면 바깥의 날씨까지 알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레이더 상에 처음 보는 크기의 물체가 바다 위에서 느릿한 속도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한 밤중이었기 때문에 육안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분간하기 힘들어 급작스레 경비정을 출동시키는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드넓은 바다의 북위와 동경을 정확하게 집어내기란 쉽지 않았고 오랜 교신 끝에 찾아낸 그것은 하릴없이 떠다니는, 커다란 통나무였다.

 

 

맹지영: 사전연습

정지현: 미술작업을 하는 친구가 전시하는 당일이 되면 꼭 잘 작동하던 작품도 고장 난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100번 정도 미리 테스트해보라고 권유했고 그 말을 들은 친구는 100번의 테스트를 거친 후, 전시 당일 101번째의 고장을 경험했다.

이형구: 시간을 계산함은 태양빛을 고려해서이다.

 

 

맹지영: 재연

이형구: 의태(Mimicry)

완전변태(Complete Metamorphosis)

정지현: -내가 범죄자가 아님을 알기에

살인미수사건이 벌어진 며칠 후 담당 수사관이 나를 다시 찾아왔다. 내가 범죄후보자 3인 중 한 명으로 몰렸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한 후였다. 수사관은 내가 저질렀다는 증언을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며 나를 떠보았고, 긴장한 나는 내가 범죄자가 아님을 알기에 애써 태연한 척 아닌 연기를 펼쳤다. 마찬가지로 내가 범죄자가 아님을 알기에 수사관이 그 순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눈빛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작은 공간 속 둘 만의 무대 위에서 범죄자가 아닌 척 연기하는 나와 수사관인 척 연기하는 한 인간은 서로 맡은 바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