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hyun Jung

매일 비슷하면서 다른 풍경 _ 정지현

매일 비슷하면서 다른 풍경

정지현

 

‘13시 53분, 선외기1척, 동쪽으로 15노트로 이동 중’

매번 지나가는 배의 행적을 기록하는 일은 지극히 따분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이런 일을 1년 넘게 하루 8시간씩 반복한다면, 아마도 이를 지루하다거나 흥미롭다거나하는 일련의 감정들로 계속해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무언가에 익숙해질수록 그에 대한 감각도 무뎌져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일상의 법칙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나의 일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매일 먹는 밥 한술과 같은 무감각한 것들 사이에서 ‘오늘은 쌀이 약간 찰지네, 마네’ 정도의 미묘한 사항들이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의미를 만들던 시기였다. 당시 내가 레이더를 통해 기록해야 했던 일지만큼은 더없이 정확하고도 무감각해야 했는데, 이는 주기적으로 통신실로 넘겨졌고 그것들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알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단지 지나가는 선박들을 고른 필체로 기록하고 전달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높은 계급의 갑(甲)같은 존재가 나의 기록을 통해 바다의 상황을 파악 하리라는 추측만 할 뿐. 따라서 평소 나의 일만큼은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는, 기억할 필요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딱 한번 배 대신 흘러가는 통나무를 잘못 기록했던 적을 제외하면 특별한 일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매일 새벽 배들은 바다를 향해 떠나갔고, 저녁이 되면 다시금 돌아왔다. 지나간 배가 남긴 너울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듯, 때가 되면 나도 매번 같은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최근에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곳은 무인화 시스템으로 대체되어 더 이상 사람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2012년) 4월부터 나는 이와 비슷한 종류의 작업을 다시 시작하였다. 매일 반시간 이상 템즈 강가에 서서 지나간 배들의 행적과 함께 강물을 기록하기로 한 것이다. 흐르는 강물을 연필로 종이위에 기록한다는 것은 사실, 기록이라기보다 피상적인 묘사에 가까웠고 더욱이 묘사라기보다 수행에 가까웠다. 이 수행은 종이에 짧은 선을 채우는 단순한 노동, 다시 말해 ‘이만큼 시간을 때웠다’라는 시시한 증거와도 같았다. 흐르는 강물, 끊임없이 움직이는 형체를 눈으로 쫓는 다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지만 기록하는 손은 보다 느렸기 때문에 형체를 보고 선을 긋는 행위는 언뜻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로 엇갈리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풍경 앞에서 나는 무력함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일시적인 순간의 것을 붙잡으려는, 또 막연한 것에 대해 확신을 심으려는 몸짓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선을 긋는 시간동안 나는 강물의 흐름을, 흘러가는 부유물을, 주위의 작은 변화들을 주목할 수 있었다. 이는 예전 레이더를 보고 기록해야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매번 실제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고 그와 함께 새겨진 종위의 흔적들은 날마다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랐다. 선박의 기록 역시 이와 비슷했다. 한 척의 배가 균형 잡힌 물살을 흐트러뜨릴 적 나는 다른 종이에 그 사건-지나간 시간, 방향, 속도 등- 들을 부지런히 써내려갔다. 오래전 시기와 비슷한 양식의 보고서였지만 이 기록에는 그와 달리 어떤 목적성이 없었다. 단지 내가 본 것에 대한 기록이었고 거듭해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직감적으로, 적어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편이 나아 보였다. 돌이켜 보건데 세상의 한쪽에 서서 일상풍경의 한 지점을 꾸준히 바라본다는 것의 가치는 사적인 사건과 공적인 것 사이의 경중을 가리기 위함이라기보다 얼마만큼 그 순간을 기억하고 매만지느냐에 따라 그 빛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덧붙여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대해서 일관성이 관건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판단을 유보한 채 이 일을 지속해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연필선 들로만 채워져 가는 백여 장의 종이들, 이 반복성은 여전히 무용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때때로 필연적, 합목적적인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하나의 좋은 수단이 되는 듯 했다. 결과로서의 이 무용함의 축적들은 다른 것들에 비해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그 형태가 다소 간결하거나 허점투성이여도 이들은 어느 위치에나 쉽게 놓일 수 있었고 내재된 임의적인 목적지가 있는 듯 보였다. 더구나 이 작업을 명목삼아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내게 중요한 일이었다. 손으로 해나가야 하는 모든 활동이 감정적인 영역과 깊은 연관을 맺는 것처럼 나는 그 순간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약하게 변해가는 그림자처럼 그 풍경은 늘 한결같으면서도 조금씩 모습을 달리했고 의식하지 않으면 쉽게 놓칠 만한 것 들이 대부분이었다. 덧붙여 그 시간만큼은 세상에 관여하는 나 스스로의 호흡을 원활하게끔 하는 쉼표가 되기도 했다. 물길을 따라 선을 긋는 시간동안 나는 마음에 안고 있던 어떤 고립과 단절의 한숨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부지런함을 요하는 선박행적 기록은 상대적으로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거리를 마련해주었다. 늘 상 이유가 존재해야만 하는 입장에서 떨어져 나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시간, 일상의 공허함을 위로하는 것은 다름 아닌 비어있는 시간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언제부턴가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은 강가에 많은 바람이 불었다. 강위의 부유물들은 서로 엉키고 흩어지면서도 일정한 무리를 지으며 한 곳을 향해 굽이쳐 흘러갔다. 흐르는 강물의 기록과 분단위로 기록되는 사소한 사건들도 그와 함께 엇갈리며 부딪혔다.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 변화들에 익숙해 질 즘이면 어느새 그날의 종이 한 장도 전보다 많이 무거워져 있었다.

2012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