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hyun Jung

<하루 한 번> / 셋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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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하루 한번 >전시도록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김세은, 박민희, 정지현

 

김세은: 처음 방문한 날, 작업실에는 어떤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지하 작업실에는 무개성의 철재 프레임들이 여러개 서 있었는데 지현 씨가 공간에 긴 선을 그어 공기를 큰 면적으로 나누어 놓은 것 같았다. 나중에 내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바로 옆의 긴 벽을 사용할 때도 여전히 작업실에 덩어리(3D)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현 씨는 정말 쉬지 않는 다람쥐처럼 뭔가를 만들고 있었지만 공간에는 오직 얇고 길거나, 넓어도 두께가 없는 오브제들만 쌓이고 있었다. 작품을 전시장으로 운송하던 날, 나는 ‘아! 그렇구나!’ 깨달았다. 작업실에서 밖으로 연결된 복도의 출입문은 매우 작아서 밖으로 나가려면 그것이 무엇이든 출입구 보다 작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좁은 문을 통과한 (아직은 재료인)오브제들을 전시장에 펼쳐 놨는데 곧 지현 씨가 이것들의 자리를 정하고 집합체로 조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익숙한 몸의 움직임, 자세와는 다른 행동으로 공간을 처리하는 것 같았다. 작업실에서 작업할 때는 한 구석에서 꾸물꾸물 작은 동작으로 움직였는데 전시장에서는 허리를 펴고 앞의 장면을 대면하는 것 같았고 그에 따라 조합되는 구조물의 스케일과 오브제가 놓이는 시점이 확연히 달라지고 있었다.

 

정지현: 작업은 그때그때 작업실 형편에 따라 결정된다. 문의 입구도 좁고 천장도 낮아 덩치를 키우기 힘든 공간에서 꽤 큰 전시장을 차지 할 매스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특별한 작전이 필요했다. 쇠막대로 만든 프레임 <라운드 오프>는 가로로 좁지만 세로로 높게 하고 여러 개로 나누었다. 이들은 전시장에서 내가 원하는 설치 공간의 높이와 넓이를 구획하고 영역을 나눈다. 동시에 사방으로 발생하는 장면을 캡쳐하고 시선을 그 너머로 통과시키는 프레임이 될 수도 있다. <더블데커>(2018)는 텅 빈 간판 골격에 수십 개의 형광등을 사선으로 나란히 매달아 퍼지는 빛으로 볼륨과 큰 면적을 만들었다. <공공조각파일>(2018)은 브론즈로 된 공공조각을 떠낸 작업이다. 작업실 근처의 건물 벽 한쪽에는 웅크린 여인의 나체조각상이 방치되어 있었고 사람보다 크고 우람한 그녀 모습은 주변 환경의 평범함을 깨고 있었다. 나는 그 동상의 외피를 다른 방식으로 옮겨보기로 마음먹었고 가볍고 얇은 알루미늄 망으로 동상을 감싸 꾹꾹 눌러 부분 부분의 모양을 떠냈다. 그렇게 떠낸 수십 개의 알루미늄 망을 서류처럼 포개 보관하다가 전시장에 가져와서 높게 쌓았다. 망으로 된 레이어를 겹쳐 만든 구조물은 기념비적인 모양을 하고도 그 뒤의 장면을 투과시킨다. 높이가 있는 매스로 전시 공간의 중앙을 차지하면서 그림과 사운드을 차단하고 싶지 않아 선택한 방식이다.

 

김세은: 설치기간동안 나에게는 큰 역할이 없었기 때문에 지현 씨의 설치 과정을 자세히 보았는데 나의 그림에서 이미지가 구성되는 방식과 정말 비슷해서 속으로 놀랐다.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그리기 과정이 현실 공간에서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장면을 선택하고 통과시키는 프레임, 해상도 낮은 레이어의 집적, 빛의 규칙적인 번짐이 만든 넓은 면, 전시장 벽면을 선택적으로 대체하는 색면 등등 페인팅이 떨어져 나온 미술관의 벽을 지현 씨가 여러 재료들로 계속 변주하는 것 같았다.

 

정지현: 전시장에서 이루어진 설치는 작업실에서 개별 오브제를 만드는 신체 움직임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기존의 전시장을 작업의 공간으로 새롭게 불러오고 오브제와 구조물들을 장면으로 연결하여 배치했다. 이때 시선의 위치를 한 자리에 정하고 일정 기간 설치를 한 다음 또 다시 좌표를 옮겨가며 일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동선으로 계속 움직이며 이들을 바라보았다. 허리를 펴고.

 

김세은: 지현 씨의 오브제는 각각의 출처가 있고 구체적인 배경도 있는데 전시장에 들어오면서 어떤 연결고리는 남기고 어떤 것은 버리는 것 같다. 지현 씨에게는 재료 자체가 가진 이야기(직접 수집)와 외부에서 가져온 형태들이 사회적으로 가지게 되는 정보(간접 수집)가 모두 중요해 보인다. 지현 씨의 설치에서는 사실에 기반한 오브제들의 정보가 눈의 감각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한 전시 공간에 나타날 때 또 다른 연결을 가진 이야기가 된다. 설치할 때 이 선택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궁금하다.

 

정지현: 작업실을 옮길 때마다 주변의 환경(공장, 시장, 길가)에 따라 발견되는 재료의 성격은 달라졌고 그 안에서 사물의 기능과 구조, 움직임을 배울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 도시의 부산물과 폐기된 자재는 내 작업의 현실적 대안인 동시에 사건의 시작이었다. 출처가 모호한 파편들을 수집하고 해체와 재조합을 반복하면서 사물이 가진 원본의 질서를 바꾸어 나갔다. 손을 먼저 움직이면서 대상은 점점 낯설어지고 새로워졌다. 그렇게 대상이 의외의 방향으로 점점 번져가도록 시간을 지내다 보면 오브제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쌓여갔다. 오브제간의 배열은 서로 긴밀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정형적이다. 원래의 재료가 새로운 몸이 되기까지 결정은 임시적이고 번복된다. 오브제 그 자체로의 물성과 그것을 향한 사회적 해석, 개인적으로 감각하는 것은 여러 방향에서 흥미롭고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등장하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의미와 감각 또한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세은 씨가 말한 연결고리의 선택은 전시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박민희:내가 생각하는 퍼포먼스란 ‘시간을 들여 감상해야만 보이는 사물(혹은 비사물) 관람하는 동안 변화하는 감각의 내러티브를 구체적으로 계산하여 설정한 시간 예술’이다. 작가의 의도대로 구현한 상태도 물론 중요하지만 관람하면서 시간에 따라 쌓여가는 감각들이 퍼포먼스를 완성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내가 사용하는 주된 질료는 사운드와 그것의 물리적 성질이다. 퍼포먼스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료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설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다. 조각과 페인팅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아직 들어오지 않은 퍼포먼스와 사운드가 두렵지는 않았는지, 사운드를 위해 어떤 식으로 공간에 여지를 남겨주었는지, 함께 있는 동안 막연히 알 수 있는 것들은 있었지만 각자가 생각한 ‘공간’은 어떤 것이었는지 정리된 생각 또한 듣고 싶다.

 

정지현: 이전에는 나의 경험에 기반한 특정한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장치로 연기, 빛, 바람, 소리와 같은 것들의 작동 시간을 조절하여 각각의 다른 타임라인 위에 올렸었다. 공간 속에 시간성을 다양한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일루전은 다분히 공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물질과 질료 그 자체만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내러티브의 확장성을 실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민희 씨를 만나 그 부분을 제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작업의 비평적 요소였던 각각의 오브제가 가진 수많은 디테일을 이번 전시에서 과감히 삭제할 수 있었고 허술한 모양을 가진 덩어리나 완결되지 않은 구조로 단순한 구획을 지어 공간을 환기한 시도는 나름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래서 이번 설치에 다다를 사운드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단지 사운드와 퍼포먼스가 설치 후반에 들어올 계획이었기 때문에 신중함이 앞섰고 민희 씨의 말 대로 이미 설치된 작업을 ‘환경’ 삼아 작업이 가능하도록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내가 생각한 이번 전시 공간은 그림의 ‘장면’을 수용하여 제3의 장면을 현실 공간에 펼치기 위한 컴포지션이었다. 재료는 대체로 날 것에서 가공을 많이 거치지 않게 하여 설치 현장에서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림 안의 이미지와 공중에서 움직이는 사운드에 순발력 있게 응대할 수 있도록.

또 나에게 있어 이 공간은 여러 가지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민희 씨의 공연이 이루어질 상상의 공간, 임시적인 조각들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잠재적 움직임이 상상 가능한) 공간, 사물들의 배치, 순서, 거리만으로도 정확한 감각의 방향성을 느낄 수 있는 공간, 퍼블릭에서 따온 대상들이 재구성된 공간, 면과 선이 드로잉처럼 가볍게 놓여 회화와 조각, 사운드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공간 등등.

 

*나머지 내용은 본문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