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hyun Jung

◼︎◼︎◼︎을 자꾸 생각하기 _ 김뺘뺘

튕겨나간 선반, 기다가 잡혀

공룡 코끼리, 날다가 떨어져

핸드아웃에는 구조물들을 도식화한 형태와 각각에 해당하는 문구들이 제시되어 있다. 공간을 가득 채운 것들은 25개의 형태로 분할되어 있다. 실제 구조물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생략된 채 윤곽만 간추려져 있고, 서로간의 인접성과 직접적인 연관 없이 나열되어있다. 때문에 구조물과 별개로 작동할 수 있는 기호 혹은 암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각 형태에는 문구들은 명확한 사태를 지칭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텅 비어있는 한편, 사적인 이미지나 내러티브를 상기시키기 때문에 부풀려져있다. 이 단어들을 각 구조물의 “제목”이라 단정 짓기는 망설여진다. 여기에 쓰인 언어는 구조물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대신 또 다른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포털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핸드아웃 속의 형태와 언어는 서로 느슨하고 작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은 어떤 사태나 사물을 지칭함으로써 의미를 획득한다기보다 어떤 인상을 주거나 생각을 촉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때문에 보편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경제로 정리되거나 설명되지 않은 채 일시적으로 종이에 옮겨져 박제되어 있을 뿐이다. 공룡코끼리는 완전히 포박될 수 없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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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전시의 가벽들이 투박하게 잘려 나와 있다.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도 있고, 지지대가 지탱해주는 바람에 채 쓰러지지 못하고 비스듬히 서 있는 것도 있다. 완전히 무너지지 못했다. 참담하기에는 모자라다. 비통하게 통곡하지도 못하고 담담하게 견뎌내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태에 걸려있는 판자들이 별다른 규칙 없이 그곳에 있다. 이렇게 어제의 일이 오늘까지도 번져오는 현장에 자리를 잡은 목재 구조물 사이로 조명, 태블릿, 유리판, 멀티탭과 전선 등이 매달려있거나 기대고 있다. 얇은 전선들은 복잡하게 꼬여서 노출되어 있고, 멀티탭도 전부 그대로 나와 있다. 뒤편으로 돌아가 보면 어떤 미약하고 힘겨운 운동을 만난다. 얇은 전선들로 휘어 감긴 이 동력은 피복이 벗겨진 전선을 천천히 회전시킨다. 절연체가 벗겨진 채 회전하는 무력한 전선은 삐뚜름한 원을 그리면서 자신을 얽어맨 전선들에 부딪힌다. 무심한 듯 어설픈 듯 운동을 지속한다. 다른 도체를 만나 전류를 흘려주지도 않을 뿐더러 돌고 있다는 것 외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둘러싼 오브제들은 뚜렷한 공통점이나 연결고리를 갖지 못한 채 놓여있다.

파이프들로 이루어진 설치작업은 아래 삼각형이 더 큰 모래시계 꼴이다. 파이프들이 클림프로 연결되어있다.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스스로를 지탱하는 데에 별 쓸모가 없는 파이프들도 함께 고정되어 있다. 이 설치물은 하중을 견디기 위한 것도 아니며, 다른 구조물을 지지하는 역할도 하지 않는다. 아무도 걸어 다닐 수 없는 비계 구조에 시선만이 간신히 걸린다. 지지할 의도가 없는 지지대, 혹은 더 잘 무너뜨리기 위해서 세워둔 철제 구조물. 그 어떤 가능세계도 지칭하지 않으면서 탈바꿈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순간 속에 이 파이프가 서 있다. 내 뜻대로 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동시에 동일한 만큼의 강렬함으로 나의 뜻이 빗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장치들은 애초에 붙잡고 있었던 것도 없었으면서 매일같이 포기한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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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밀한 내러티브들이 생략되고 명명할 수 없는 풍경만 남았다. 뼈대가 앙상하게 구멍 난 가벽이 가르고 있는 공간들 중 어느 곳이 앞이고 뒤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그러니 멋대로 백스테이지라고 생각해본 안쪽의 공간이 사실은 무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엇박자의 효과음 같은 멜로디 소리가 실은 합당한 연주일 수도 있겠다. 종이가 날린다. 어렴풋한 약속 같은 것이 녹지 않을 눈처럼 내려앉는다. 중첩된 면면들은 벽을 기대어 있다. 나무로 짜인 텅 빈 진열대 위에 나무 조각 두 개, 그리고 그 앞에 엎드린 수석 두 개는 어린 시절 놀러갔던 친구 네 집을 연상시키려다 그만둔다. 희미한 빛들이 해독할 수 없는 주황빛 암호를 전송한다. 더 이상 빛을 내지 않는 탐조등이 일렬로 달려 있는 전동휠체어가 숨을 고르고 있다. 반대편 벽면에는 한때 그 탐조등의 잔상들이 남겼던 메시지가 잘못 끼워 맞춘 퍼즐처럼 뒤섞여 붙어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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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가려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열리지도 않는 검은 격자를 채워 넣은 기계 장치들. 모니터, 금속, 조명, 전선, 저화질 애니메이션,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달리고 쫓기고 펀치를 날리는 동물들. 누군가의 어지러운 머릿속 같다. 무너져 내리는 가능세계와 추락하는 약속들은 마무리되지 않은 과거를 자꾸 불러낸다. 쉽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어서 꿈에서라도 끊임없이 곱씹어댄다. 오늘 밤 자고 일어났다고 전혀 새로운 삶으로 깨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모든 긴장을 이완해버린 수면시간에조차 알던 사람, 익숙한 풍경, 어제의 잔재들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온다.

7.
이 사물들 앞에서 기어코 길을 잃고 만다. 약간의 두려움으로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꺼내 들고 렌즈 뒤에 숨는다. 구조물 사이로 난 길을 다시 읊어본다. 노출된 전선들을 밟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빛, 서로 다른 질감의 재료들, 세워진 판자들, 이를 세워 지탱하는 지지대, 잡음들, 서로 다른 높낮이, 파편들로 구성된 미러볼, 흩날리는 종이, 레일, 매끄럽지 않은 것, 잘려나간 가벽의 찌꺼기, 돌. 사진을 찍는 것은 경주마에게 차안대를 씌우듯이 의도적으로 시야각 결손 상태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한번에 볼 수 있는 것도 굳이 나눠서 보겠다는, 제한된 시각조건 속에 들어가 있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분절시킬 수 없다. 사물들의 절박함은 번역될 틈도 없이 산만한 노이즈로 흩어진다.

각 기계들은 시차를 두고 작동한다. 각자의 주기와 지속시간을 유지하며 재생된다. 천장에서부터 약속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불협화음의 멜로디가 울리기까지 몇 번의 딸깍임을 견뎠다. 나의 기다림과 무관하게 각 장치들은 각자의 속도로 운동을 지속했다. 나의 의지를 반영해주지도, 의사를 전달하지도 않는다. 다만 어떤 떨림 혹은 진동 같은 것이 전달되는 통로들이 드러나 있을 뿐이다. 진동의 주름들 사이로 베어 나오는 것. 시작과 완결이 없는 발화. 의미가 생성되기 직전의 어떤 파열음 같은 것. 예상 가능했던 무너짐에 대한 미약한 징후. 파국의 뼈대들 사이로 지저귀는 기계음들이 생성해내는 풍경.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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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전작들에서 작가의 개인적인 내러티브가 풍경의 느슨한 출입구가 되어주었던 반면, ◼︎◼︎◼︎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단위들과 그 연결들을 해명하기 위한 통약 가능한 사건을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이거나 특수한 것이라 하더라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의 풍경은 보는 이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다. 방향을 보여주지 않을 뿐 아니라 보는 이의 심정과 무관하게 부지런하다. 매끄럽게 기계적인 것 앞에서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을 이들이 ◼︎◼︎◼︎에 괜한 기대를 걸었다가 이내 외로워지고 만다. 충분히 서사적이지만 다분히 랜덤한 구조들 앞에서 헤매다가 결국 좁은 방안을 들여다보고는 저마다의 소통 불가한 소음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그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형태와 언어 사이를 저마다의 도약으로 채워 넣는다. 비약하는 언어로 접속한다. 그러나 이 비약은 초월적인 것을 향하거나 화해를 도모하지 않는다. 다만 눈앞에 펼쳐진 ◼︎◼︎◼︎의 장면으로부터 또 다른 경험적인 파국들을 연결 지을 뿐이다. 구조물들이 만들어낸 세계 안에서 끔뻑이고 딸깍이는 장치들을 떠올려야 한다. 그러한 연상들로 빈칸을 채우고 형태와 언어 사이의 간격을 조정한다.

10.
할 수 있는 것은 장치들을 바라보기, 막연한 풍경 주위를 서성이기, 끝내 잡을 수 없었던 공룡코끼리를 생각하다 멍해지기. 이 움직임들을 그만두고 이제는 작별을 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냐고 되묻는다. 무엇을 위한 ‘지움’이었을까? 불가피한 ‘비움’이었을까? 빈칸으로 남게 된 ◼︎◼︎◼︎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묻는다. 어떤 단층이 있었는지, 절단면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 놓친 것은 없었는지 보고 다시 본다. 하지만 결국 남은 것은 각 장치들 곁에 선 채로 그것들이 만들어낸 공간을 잠시 점유했던 몸의 어색한 감각이다. 모든 지층들을 비결정의 자리로 던져놓고 지시 작용을 와해시킨 것은 직관적인 무책임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다시 세우기 위한 무너뜨림이었을까, 아니면 아직 파괴가 덜 된 상태인 걸까? 일반적인 지시관계가 생산해내는 언어나 선형적인 내러티브가 삭제된 구조물과 그 풍경이 여전히 존재해야만 한다고 설파하려면, 의미-지움(erasure)이 의미를 지우게(make carry) 되는 정도의 강도를 확보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 무의미와 무-쓸모가 너무 철저한 탓에 어쩔 줄 몰라 나도 함께 침잠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순간을 기대했다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한 가지는 확실하고, 다른 한 가지는 불확실하며, 또 다른 한 가지는 반쯤 확실하다. ◼︎◼︎◼︎은 나를 긴 시간 동안 가두어 헤매도록 하는 데에 성공해낸 빈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나에게 어떤 감각의 단층들을 만들어냈는지는 알 수 없다. 의미의 소거 혹은 지연이 무의미를 위한 무의미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파괴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라면, ◼︎◼︎◼︎은 아직 절반밖에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서서히, 하지만 철저하게 자멸하기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