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염섬> / 흔들리고 중첩되는 프레이밍 사이에서 거닐기 _ anonymous
흔들리고 중첩되는 프레이밍 사이에서 거닐기 : 전시장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6월 20일 현재 두산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곰염섬>을 관람한 관객들은몇 주동안 실시간으로 감상을 트위터에 올렸다.
@formanlevel 미시적인 풍경, 디테일에 마련된 작가의 주관적 미감에 동조하게 되는데 그것 이 과연 어떤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오브제를 그러모아 키네틱과 적절히 조합 /배열/나열하는 방식.(…)
@EmeraldCloud 곰염섬은 관객들이 마주치게 될 생경한 풍경을 암시하며’라고 적혀있었지 만 생경하지는 않았다
@ckouni 폐허 스타일 데코레이션인테리어같다
@buttonnamesad 페이퍼에 작은 그림들과 맞는작품을 찾아다니려고 오래 있었는데, 확실 히 관람자를 오래 있게 만드는 전시였다
@merefrain 인간적 이미지를 해석하는 무모한 시도를 벌이는 것 같았다.
관객들의 전시에 대한 감상은 제각기 달랐다. 전시를 보는 방식도 사용하는 단어도 상이했다. 그리고 이런 관객들의 감상은 제 나름의 이유로 수긍할 만하다.서 있거나 쌓여 있는 부서진 가벽과 목재 구조물들, 그 사이에 놓인 작은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장치들, 도시 어딘가에서 주워온 듯한 깨어진 콘크리트와 목조 조각들, 부분 조명을 통해 무대와 같이 드러나는 공간들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전시장을 감상하다 보면 작가의 주관적인 취향과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폐허’ 같기도 하고 ‘인테리어’, 같기도 이 전시장의 초입에는 전시 리플렛이 놓여 있는데, 그 뒷면에는 퀘스트처럼 전시장 사물들 24개의 테두리를딴 그림과 그 그림들의 명칭이 한영으로 적혀 있다. 이는 한 장짜리 리플렛의 절반을 차지하며 번호까지 붙여져 있어 마치 하나하나 동그라미를 치면서 사물들을 찾아야 할 것만 같다. 머무르며 그림에 맞는 작품을 발견하는 것 또한 일리있는 감상의 방식이다. 또한 모든 설치된 기계 장치와 조형물들은 제각기 작가의 의도와 사연을 품고 있는 사물이기에, 이 사물이 어떤 시도 속에 놓여있는지 짐작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그러나 이 모든 전시장의 작업들이 결국 어떤개념을 가시화하고 있는지는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관객들은 전시를 관람하면서도 약간의 모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모호함을 느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곰염섬>을 본 많은 관객들의 반응은 전시의 컨셉이나 전달하려는 개념을 명확히 인지하고 그것의 시각화가 잘 되었는지, 설치가 잘되었는지를 평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차라리 그 들의 감상은 전시를 독해하는 익숙한 몇몇 방식. 작가의 미감을 파악, 개념의 시각화, 전시장의 표면이 전달하는 인상의 포착 등-그 자체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 감상들은 그 방식들에 온전히 포획되지 않는 전시의 잔여를 드러낸다 전시는 관습적 독해의반응들을 양산하는 동시에 그 평가의 그물을 빠져나가고 있어서 ‘전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되돌려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양상은 <곰염섬>에서 관찰되는 것만은 아니다. 최근 서울에서 마주치는 몇몇 전시들은 외부 대상의 재현’ 개념의 명료한 가시화, 물성의 탐구와 같은 문제를 다루는회화나 조각들을 좌대다 벽면에 일정한 간격을 두어 설치하고 전시 서문으로 그 작업의 이해를 돕는 방식의 전시와는 거리가 멀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의도적으로 헝클어져 있으며, 오브제 또한 줄을 맞추어 전시되기보다 이리저리 늘어놓아져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우리는 최근에 열렸던 인사미술공간의 <실키 네이비 스킨>과 같은 전시를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정리가 되지 않은 작업실처럼 느껴 지는 1층의 전시장에는 표면적인 정보가 바로 그 사물의 본질의 추론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상한 오브제들이 이리저리 놓여 있다. (가령 벽면에 붙어 있는 금속의 직사각형처럼 보이는 것은 가까이 다가가 보면 종이재질이다.) 관객들은 불확실함 속에서 판단하고, 상상하며 자신만의 해석을 이끌어내야 했다. <곰염섬>과 <실키 네이비 스킨>은 재료나 미적인 감각은 매우 다르게 느껴지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파악하기 어렵고 관객이 제각기 표면을 조합하여 해석을 해야한다는 난감함을 공유하고 있다. 이 것은 또한이 두 전시만의 경향은 아니어서, 어떤 관객들은 최근의 혼란스러워 보이는(?) 여러 전시들을 두고 ‘불친절한 전시’라 말하기도 하고 어떤 비평가들은 작가들에게 미학을 가시화하기 위해 좀더 노력하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간혹 이러한 전시들의 기호적 특성을 읽어내지만, 기호의 해체와 같은 개념은이미 선배 작가들이 선취한 작업이라며 이것이 혹여나 ‘진부한 반복은 아닌지 ‘우려한다.
분명 <실키 네이비 스킨>이나 <곰염섬>과 같은 전시장의 오브제들은 단일한 속성 혹은 개념을 가시화하지 않으며, 기호가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으며 해체되는 것이 뚜렷하게 보이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 미감이나 소재, 리플렛에 얼핏 드러난 어조 등이 전혀 다른 두 공간이 이러한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기호의 해’체와 같은 개념이 과거에는 ‘전달되어야 할 개념’으로서, 오브제로 시각화되어 전시에 등장했다면, 이제 이 개념은 너무나 진부하고 당연한 것이 되어 오늘날의 전시장들에서는 ‘디폴트’로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기반 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미학적 경험은 ‘미학을 가시화’하라는, 혹은 전시가 ‘숨은그림찾기’ 같고 ,’난해하다’는 등의평이 전제로 하고 있는 미적 경험과는 상이한 것이다.
어떤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이러한 전시장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경험들에대해 좀더 생각해 보자. 서문을 읽어가며 개념을 찾는다든지, 물성 자체를 감상한다는지 하는 익숙한 전시의 문법에 온전히 들어맞지 않는 전시장들을 보면서, 우리는 “좋다”,”나쁘다”라는 감성적 판단 한두 마디로 감상을 마무리하곤 한다. 언어화되지 않은 감상의 경험 이후 나오는 “좋긴 좋은데 왜 좋은지는 모르겠다”는 반응은 이런 상황에서 매우 상식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은 때로는 인스타그램에서 하트를 누를 때의 상황과 유사해 보인다. 개별 사물을 중앙에 놓고 초점을 맞추어 촬영한 뒤 그 사진을 업로드했던 예전의 감각 대신, 인스타그램의 몇몇 컷들은 여러 사물들을 ‘주의깊게 흐트러놓고’, 그 어우러짐을찍는 감각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진의 감상에서는 개별 사물이 무엇인가? 라는 규명보다 시각적 표면이 이뤄내는 조화를 느끼는 것이 우위를 차지한다 오브제의 의미가 모호한 상황에서, 우리는 감각적 합을 즐기거나, 그도 아니면 각자의 의미를 부여하며 무한히 상상을 전개한다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위에서 언급한 새로운 전시 공간들은 언뜻 보기에 마치 무한한 의미를 향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 기도 한다 무엇을 연관짓고, 오브제의 어떤 면에 주목하여인접한 오브제와 함께 해석할 것인가는 철저히 관객의 선택에 달렸다。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얻어갈 수있는 것은 무엇인가 의미의 연쇄? 무한한 상상력? 그렇다면 그냥 난삽하게 어질러진 미지의 공간을 찾아가면 되는 것 아닐까? 동시대에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된 이러한 공간에서 찾을 수 있는 미적 경험이 있다면 무엇일까?
최근의 많은 전시들 중에서 도 <곰염섬>은 관객들의 관습적인 전시의 독해들을 의도적으로 비껴가는 동시에, 동시대 전시장의특징 하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또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특징이란 프레이밍의 가능성이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프레임화해서 바라보아야 하는가? 어디에 초점을 두고 응시해야 하는가? 이것이 동시대의 특징이라는 것은 최근 sns에 실시간으로 업로드되는 수많은 전시장의 사진들을 보면알 수 있다 촤대나 벽면에 물기가 섬세하게 조정되어 설치된 기존의 작업들을 찍을 때는 작업의 경계선과 내가 찍는 사진의 프레임 사이의 여백을 얼마나둘 것인가 혹은 몇 개의 작업을 한 화면에 넣을 것인가 정도만이 문제가 되는 반면, 오브제가 두서없이 어질러진 것처럼 보이는 작업들은 그것들을 바라보는거리와 초점을 어떻게 설정할지를 결정하는 방식이 관객들마다 제각각이다 관객들은 극단적으로 오브제의 표면을 확대해서 사물의 물성에 주목하기도 하고, 심드렁하게 사물의 귀퉁이가 잘리든 말든 여러 사물들을 겹쳐 전체를 찍어보기도 한다. 1)
작가가 이러한 동시대의 관람 경험을 인지하고 있음은 그의 리플렛에 잘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 리플렛 뒷장에는 전시장 내 사물 또는 장소의 테두리 선을 따 놓은 이미지가 24개 인쇄되어 있다. 작가의 시선으로 프레이밍된 그 이미지들에 작가는 이름과 번호를 붙여 놓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들을 관객이 실제로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는 그저 작가와 관객이 이 전시장을 바라보는 방식 사이의 큰 괴리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미지들을 대강이라도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의 이름을 확인하며 관객은 또 난관에 부딪힌다. 가령 8번의 이름은 ‘총명(The Clever)’이다. 사물 또는 장소가 총명하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여간해서 이것의 연원을 정확히 유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제각기 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만을 확인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미지의 해석을 위해 대상의 범위를 설정할 때, 거기에는 여러 원리가 근거로 작용한다. 가령 인접한 두 대상의 공통점을 따져 그 두 대상 간의 관계를 질문하고, 이들을 한 화면에 담아 해석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혹은 오브제 하나만을 주변 배경이나 사물에서 떼어내어 그 오브제만의 작동과 미감을 충실히 바라보기도 한다. 정지현은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의 사물이 인접한 사물과 연결지어 해석될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세심하게 여럿 만들어놓았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에는 부서진 가벽이 보인다. 가벽의 일부는 기다란 사각형으로찢어져 있고, 그 사이로 분홍빛의 형광 조명 이 빛나고 있다. 그 형광 조명의 크기는 찢어진 사각형의 면적과 거의 일치해서 의도적으로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서진 가벽 너머로 걸어가 보면 그 조명은 바닥에 길게 눕혀져 비어 있는 공간을 밝히고 있다 전시장 입구에서 선 채로 가벽을 채우고 있던 불빛은 다른 지점으로 걸어갔을 때, 바닥에 홀로 놓인 조명으로 인지된다.
이 곳을 지나쳐 이번에는 전시장 한켠에 자리한, 가벽을 쳐서 만든 공간에 진입했다고 생각해 보자. 이 방에서 비슷한 면적의 검은 사각형과 목재로 만든 삼각형이 벽에 기대어 놓여 있는 것을 본 관객은 두 오브제의 시각적 어울림에 대해 생각한다. 이 때 관객은 이 둘을 연관지어 감상하고 있다. 이윽고 방을 떠난 관객은 얼마 뒤 다시 돌아와 다시 검은 원을 응시했고, 문득 그 원에두 명의 사람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본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에 걸린 회화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그 안에도 두 명의 사람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 때검은 원을 옆 벽면에 걸린 회화와 함께 묶어 해석하기 시작하며, 이전과는 또 다른 관객은 해석을 만들어낸다.(실제로 카메라의 초점에 따라 검은 사각형은다르게 촬영된다.)
그런가 하면 관객은 작업대에 놓여진 두 개의 장치를 수도 있다. 그 장치들은 목재와 여러 전선, 모터로 만들어져 있다. 그는 두 장치들이 움직이며 내는 미세한 소리의 질감과 시각적 형태를 비교하며 감상한다. 그러나 잠시 후 전시장을 한 바퀴 돌다가 작업대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리고 무심코 작업대에 달린어느 작은 모니터를 응시했을 때 그 모니터가 신이 아까 보고 있었던 작은 장치 두 개 중 하나를 찍은 영상을 상영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다시 작은 장치들이놓인 작업대로 돌아갔을 때, 관객은 그 장치 중 하나에만 카메라가 놓여 있고, 촬영을 돕기 위해 작은 조명이 달려 있음을, 그래서 그것이 일종의 촬영장이기도 했음을 발견한다. 이 때 비슷해 보였던 두 장치의 위상은 일순간 달라진다 .
한편 흩뿌려진 명함 크기의 흰 종이들을 밟으며 부서진 회랑처럼, 무대 뒤편처럼 생긴 공간으로 들어갔을 때, 관객은 그곳에서도 몇몇 오브제를 만나게 된다. 그 곳에서 관객은 나무로 된 선반 위에 바람이 나오는 장치 가느다란 전선에연결된 조명의 빛을 받고 있는 직사각형의 긴 거울. 전선 꾸러미 등이 올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관객은 거울에 반사된 빛이 어디를 향하는지 시선을 돌리다가 그 빛이 맞은편 어두운 벽에 비춰지면서 은은한 주황빛 무대 조명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 빛으로 인해 몇몇 오브제들의 그림자는 마치 연극 배우처럼 화면에 등장하고, 목재 벽은 일순간 무대가 된다. 무대 뒤편의 공간처럼 느껴졌던 그 장소에서 또 다른 공연이 상연되고 있음을 발견하게되는 것이다.
이처럼 관객은 시차를 두고 두 가지 다른 프레이밍을 거치며 명백히 다른 맥락이 생성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그간 작가가 만든 전시장의 세계가 변한 것은 아니다. 관객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변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연의 연쇄나 상상력의 무한함 덕분이 아니라 분명한 작가의 조형적 선택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공간 속에서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만 인지하기 어려웠던’ 것들을、’반복적이지만 상이한’ 프레이밍을 통해 경험하게된다 정지현의 <곰염섬>은 관객들이 방향성 없이 끝없는 상상을 펼치게 하기보다는 개별 오브제에 여러 레이어의 장치를 겹쳐 둠으로써, 시차 속에서 여러 해석 사이를 오가고 또 그 해석들을 중첩해보는 경험에 이르게 한다. 이는 마치 각자의 방식대로 촬영을 하러 들어온 관객들을 위해 여러 군데에 초점을마련해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 기도 한다. 시청각적인 감상만이 가능한 듯하던 표면과 작은 소리들은 관객이 초점을 맞추고, 프레임을 작동시킬 때 적극적인의미화가 가능해진다. 이는 단순히 표면을 유영하며 시청각적 인상의 합에 따라 호불호를 느끼는 관람 경험와는 다른 것이다.
불가능해 보이던 의미화가 가능해지는 경험은 전시장의 한 영상을 통해서도 경험할 수 있다. 전시장 가운데에는 금속과 모터, 유리판 등의 재료로 복잡하게 구성된 공간이 있으며 바닥으로 시선을 옮기면 흰 종이 상자 안에 영상이 투사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영상은 몇 가지 클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한 클립에는 몹시 나쁜화질로 인해 뭐가 뭔지 식별이 불가능해 보이는 어떤 풍경이 등장한다. 한편 계속 그 영상을 보고 있으면 색점들의 일정한 일렁임을 통해 그곳이 강변이라는것을 짐작하게 된다. 여전히 무엇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관객은 어느 순간 강물과 도로를 구분하게 된다. 영상의 막바지에서는 세 개의 흐릿한 점이 나타나는대 초반에 보았으면 흐릿한 색점으로만 인식되었을 이 점들이 ‘사람’이라는 것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어느새 명확해져 있다. 이 영상을 보며관객은 어떻게 초점을 맞추고, 대상을 얼마나 지속적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대상에 대한 의미화가 다르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관객은 시간의 지속과 프레이밍의 반복 속에서 계속해서 다른 경험 사이를 오간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느덧 리플렛에 인쇄된 24개의 테두리선은 찾아야 할 ‘답’이 아니라 그것을 그린 작가조차도 동일한 선을 정확히 포착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지표(index)’에 가까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것들은 무한히 가능한캡쳐 중의 하나를 옮겨둔 것에 불과하다. 24개의 테두리선은 찾아야 할 정답으로서가 아니라, 이 전시장에서 관객들의 감상을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될 전시장 속 오브제들의 위상을 보여주는 한 단편으로서 놓여 있는 것이다.
전시장 안의 모든 것들은 작가가 모든 설치를 끝냈을 때, 완결된 채 놓여 있었다. 그런데관객이 이것들을 인지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것들은 하나의 방향으로 해석이 수렴되어가는 상태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프레임들이 겹쳐지고, 그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상태에 놓인다. 관객들은 반복할수록 다른 것들을 발견할 것이나, 이전에 발견한 것들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이 전시장은 끝내 알수 없는 영역이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남아있는 영역, 그러나 끝내 하나의 의미로만 귀결될 수도 없는 영역이다. 끼워 맞춰 생각하면 ‘한 편으로말이 되는’ 이상한 관계, 그러나 그 관계를 한 번에 포착하기 힘들게끔, 또 의심하게끔 하는 다른 장치들 때문에 그 관계는 곧이어 뒤집힐 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다.
이 전시는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고, 일상에는 없는 초현실적 풍경을 가시화하여 관객에게 감각적인 생경함을 주는 전시와는 거리가 멀다. 기호에 대한 개념을 조형을 통해 전달하는 작업도 아니며, 작가의 이야기나 관심 주제를 시청각적으로 조형하고 그것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데 방점이 찍혀있는 전시도 아니다. 익숙한 재료로 전통적인 형태의 키네틱을 구현하는 오브제를 만들었다고 해서 이 전시를 레트로적으로 볼 수도 없다. 이 전시는 다분히 동시대적인 관람 조건을 의식하는 가운데 관객이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독특한 관람의 상태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 상태 안에서 전시의 오브제들은 관객과 그들의 시간이 들어오기 전과는 분명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일순간 관객이 직조한 의미망은 잠깐 눈을 돌리는 사이 다시 허물어지고 전혀 보이지 않던 것이 반복적 응시를 통해 희미하게 인지된다. 표면의 감각만이 주어진 이 전시장에서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 걸까, 새로운 조건의 전시장에서 벌어지는 경험을 설명하는 언어들은 이제 새롭게 고민되어야 하며, <곰염섬>은 그 시작점의 어딘가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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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비평 웹사이트 <집단오찬>에 올라온권시우 씨 글의 일부는 동일한 현상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밈 미우는 자신에게 할당된 방에서 아그리파 이미지의 입상과 주변의 폐허를 다각도의프레임 속에 포착하게끔 유도하 며 소위 ‘2.5D의 폐허를 연출한다 달리 말해 베이퍼웨이브의 더미에서 크롭했을 뿐인 아그리파를 비롯한 이미자객 체들과물리적 폐허가 등가로 무가치해지는 순간이다 이처럼 프레임 속에서 착시로서나아 연출되는 2.5D의 폐하이 말로 일련의 작업들이 지향하는 무맥락의 특정성이고 작가가 이중화된 공간, 이를테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자신의 무대공간으로써 인위적으로 뭉개는 방식이다 혹은 이때 2.5D의 폐하는 특정 인물은부재하되, 물리적 공간 자체가 데이터라는 필터를 먹인 채 업로드한 셀카 사진처럼 보인다. 관객이 휴대한 스마트폰 내장형 카메라가 정면성을 고수 하면 폐허와 정확히 포개진 유사 베이퍼웨이브 이미지로. 에슷한 각도로 미끄러지는 순간 입상의 얄팍한 두께감을 노 출함으로써 후경에 불과했던 폐허의 공간감이부각되는 식으로 이미지, 무대, 공간 간의 위계가 실시간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시대정신: *사이키델릭: 블루>. 폐허 (발명) 이후의 예술 중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