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hyun Jung

<곰염섬> _여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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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경환 |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월간미술 2016년 7월호

 

정지현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뜯어내다 만 채 쌓여있는, 기존 전시에 쓰였을 가벽들의 헐벗은 광경이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전선들, 골조를 드러낸 목재들이 정지현의 이전 작업들(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잡다한, 용도를 알 수 없는 파편들일)과 익숙한 듯 생경한 오브제들이 무질서하게 이어져있다.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게 만드는 전시 구성이지만 어느 것이 작품이고 어느 것이 작품이 아닌지, 대체 전시장인지 아직 준비 중인지 모를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답을 찾기 위해 〈곰염섬〉이라는 전시 제목을 살펴봐도 소용이 없다, 이미 그것은 무의미한 글자의 나열일 뿐이라고 작가가 선언했으니까. 사실 차분히 전시장을 거닐면 거닐수록 무질서한 배치 속에 세심히 구축된 질서의 흔적이, 무작위적인 나열 속에 계산된 연출이 슬며시 엿보인다. 그럼 여기서, 감각적이고 트렌디한 시대에 뒤떨어진, 좀 촌스러운 질문을 해보자. “이 생경한 풍경의 의도적 제시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체 무엇인가?” 관람객을 알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이 불편함 속으로 밀어 넣는 이유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풍경에 대해서 작가는 “빠르게 바뀌는 가변적인 현실 앞에서 개인이 느끼는 무기력한 상황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변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한다. 큐레이터와 작가로 그와 같이 일해 본, 필자가 아는 정지현은 매우 치밀한 작가다. 함께 했던 〈로우테크놀로지 : 미래로 돌아가다〉(2014.12.19~ 2015.2.1,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촉박한 준비기간에도 그는 전시기획안을 꼼꼼히 읽고 그에 정확히 조응하는 새로운 작품안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보내왔다. 몇 번의 예민한 의견조율 과정 속에서도 그는 늘 정확한 언어로 자신의 작품안을 설득했고, 유연한 태도로 조율에 임했다. 최종적으로 지금까지 발표해 온 자신의 구작(舊作)들이 공연 전의 연극무대처럼 골조가 드러나는 공간 뒤편에 놓이고, 3D 아바타 스킨을 결합한 BJ의 인터넷방송을 보여주는 신작 〈Skin Paster〉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로우테크와 하이테크가 혼재된 현실과 그 경계를 묻는 작품 〈테크 리허설〉을 선보였는데, 이와 같이 구작과 신작이 뒤섞이는 방식은 이번 개인전 〈곰염섬〉에서 선보이는 전시 구조와도 일치한다. 사실 필자에게는 정지현의 이번 개인전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고, 그 작품은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집단적 심상으로서의 풍경을 제시한 것으로 읽힌다. 다루는 매체가 매우 다양한 정지현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 중에 하나는 사회나 현실의 거대함과 반복성 앞에 선 예술가 개인의 자의식이다. 그 자의식은 대부분 매우 개인적이고, 시적이고, 추상적이고, 끊임없이 좌절과 무력함을 느끼지만 결코 그 세밀한 무늬들의 기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개별성과 섬세함을 위해 그는 자신만의 오브제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은 현실과 매우 닮아있기도 하고(〈아무도 모르는 곳〉), 너무나 기괴하고(〈Bird Eat Bird〉), 조금씩 움직이거나 흩날리기도 하며(〈저편의 리듬〉), 빛나다가 서서히 사라져간다(〈Night Walker〉). 자신의 기존 작업들까지 과감히 하나의 파편들로 만들어버리는 폐허의 힘은 미약하지만 파괴를 통한 구축을, 망각을 통한 상기를 끈질기게 촉발시킨다. 그것은 사회학자 김홍중이 발터 벤야민의 철학적 방식을 일러 만들어낸 말 ‘파상력(破像力)’과 맞닿아 있다. 부재하는 대상을 현존시키는 힘인 유토피아적인 상상력의 반대에 있는 파상력은 현존하는 대상의 비실체성 혹은 환각성을 깨닫는 힘으로, 어떤 구원의 가능성은 미래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폐허로서의 현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파괴하고 다시 구축하는 과정, 그 순간 속에 있음을 말한다. 파괴 – 수집 – 만화경적 구축을 통한 파상력의 21세기적 구현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풍경이 아닐까. 현실의 부유하는 잔해물들 속에서, 그 폐허를 새롭게 구축할 수 있는 힘은 먼저 그 풍경을 그대로 눈앞에 펼쳐내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지현의 의미 없는 작업의 의미는 바로 여기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