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hyun Jung

정지현: ‘만들기’의 실천 _ 전효경

전효경 (아트선재센터 큐레이터)

월간미술 2019년  3월호

 

정지현은 어릴 때부터 ‘만들기’라는 활동을 해왔고 지금까지도 미술가로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만드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크고 작은 것을 취하며 만드는 일에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을 최대한 축소하는 법을 몸소 익혀왔다. 그러나 그런 두터운 훈련의 시간을 지나온 지금 그가 하는 작업이 단순한 ‘만들기’에 그친다고는 할 수 없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구조와 사물

정지현은 누군가가 내다버린 무기명의 산업 폐기물을 자신의 작업실로 가져오면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가 이것들을 가져오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그 재료를 만나기 전에 일어났던 사물의 역사에 호기심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정지현은 분명 자신과 크게 상관없던 사물을 작업실로 가져와 자신이 보고 싶은 형태로 바꾸고 다른 기능을 부여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만든 크고 작은 조각들의 개수가 많아지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만들기를 통해 그 형태와 쓸모가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사물들안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서울에서 있었던 그의 지난 몇 번의 개인전 <못다 한 말>(2010, 갤러리스케이프), <빗나간 자리>(2011,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 <Bird Eat Bird>(2013, 인사미술공간), <곰염섬>(2016, 두산갤러리)에서 그는 자신이 사물을 온전히 독대하며 만들었던 자신의 조각들을 가지고 만든 세계에 타인을 초대했다. 특히 그의 초기 개인전 <못다 한 말>, <빗나간 자리>, <Bird Eat Bird>에서는 주로 무대 장치, 극의 형태 등 서사를 풀어낼 수 있는 전통적인 구조를 적극적으로 가지고 왔다. 그의 첫 개인전 <못다한 말>은 그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전시 때 보여줬던 설치를 재구성한 전시인데 그가 만들었던 많은 조각 작품들을 갤러리 천정 위에 설치하고 갤러리 공간에는 천정 위를 볼 수 있는 사다리를 하나 가져다 놓았다. 천정은 발을 디딜 수 없는 공간이고 사다리를 올라가야지만 그 공간을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전시 관람자의 입장에서 동선에 막대한 제한을 주었다. 그의 작업 <Bird Eat Bird>는 보다 직접적으로 연극적인 구성을 가지고 와서 자신이 설정한 대상 ‘새’와 그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후의 작업 <듣기 위해 귀를 사용한 일>(2014)에서는 어떤 방을 만들고 그 안에 층위를 달리하여 조각과 영상을 배치함으로써 공간 안에 하나의 소실점과 그 소실점에 대한 거리감 설정이 꽤나 분명한 상황을 구성했다. 그는 관람자가 그의 작품을 보는데 있어서 지나야 하는 통로를 구성하여 작품을 감상하는 데 어떤 단계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도록 했고 이것은 연극에서 관객이 정해진 자리에서 막이 열릴 때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과도 닮아 있었다. 나는 점차 관람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단계는 정지현의 설치에서 필연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2016년 개인전 <곰염섬>은 모든 과거의 전시를 통틀어 가장 많은 양의 작업을 한자리에서 보여준 전시였다. 이 전시는 이전 전시에서 보았던 작가의 감상 구조 설정에 대한 나의 예측을 깼다. <곰염섬>에서는 갤러리 전체를 캔버스로 보고 화면을 컷아웃하듯이 공간을 구성하면서, 사물에 대한 단편적인 응시와 서사에 대한 몰입의 선형적인 단계를 가지고 나타나는 무대적인 상황, 그리고 이러한 장면의 레이어를 종합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현미경을 통해 보는 것처럼 미시적인 관점으로 바라봤던 세계와 망원경의 렌즈로 관망했던 세계가 같이 붙어 있어서 소실점이 각기 다른 풍경 여러 개가 한 공간에서 여러 겹의 층을 가지고 드러났다. 또한 작가의 신체 사이즈를 능가하는 재료를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했고 그가 사물의 형태를 탐구하는데 집중하고 있음을 선언적인 태도와 그 에너지를 통해 드러냈다.

 

실재를 탐구하는 방법와 사물

최근에 있었던 전시 <하루 한 번>(아트선재센터, 2019)에서 선보였던 정지현의 작업을 보면 <곰염섬> 이후로 작업의 방식이나 형태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전시에서 그가 일궈낸 장면은 각 물체들을 소상히 탐구했던 것의 모음이다. 그러나 장면을 만들기 위해 각각의 조각을 장면의 한 부분으로서 바라보고 작업한 것은 아니었다. ‘조각’이라는 조건을 성립하게 만드는 사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물이 손 끝에 닿는 촉감과, 무게감과 질감, 사물의 형태와 색깔, 그것이 가진 온도, 어쩌면 그 쓸모까지도 그의 작업 과정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그 만의 방식으로 정의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지현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던, 밖에서 가져온 사물을 자신의 것으로 사유화하고 있었다.

 

최근 정지현의 작업을 ‘사물 탐구의 시간’이라고 일컫을 수 있다면 그 탐구의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작품의 완성)은 그것의 모양을 다듬는 것이었다. 정지현의 최근 작업 <바위책>(2018)은 그가 사물의 형태적인 특성을 고민했던 작업 과정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예이다. 그는 철, 유리, 타일 소재의 물질과 운동화 형태가 있는 조각을 한데 모았고, 어떤 가구에 사용됐을 법한 철프레임과 함께 그 요소를 엮었다. 작품의 한 부분에는 각 재료의 형태를 물리적으로나 화학적으로 가공하는 조각 과정을 최소화하면서 재료의 형태적 출처를 보호하고 각 재료를 층을 만들어 배치한 반면 다른 한쪽에는 바닥 바깥쪽으로 굽혀진 형태의 운동화 조각을 놓았다. 이 조각은 낡은 운동화에 힘을 가해 형태를 바꾸고 그것을 자동차 도색에 사용하는 프라이머로 여러 번 덮어서 그가 운동화에 가한 에너지의 찰나를 캡쳐한 것이다. 운동성이 명확한 조각과 정적인 재료를 한 덩어리에 모아 어떤 에너지의 평균율을 찾고자 사물을 공부하는 것 같았다. 그는 각기 다른 재료와 재료가 갖는 에너지의 다양한 방향성이 한 덩어리로 조합됐을 때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듯 했다.

 

정지현의 작업에서는 뿌리가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사물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모여 통합된 생태계를 조성한다. 그가 사물을 사용하여 만들어 낸 생태계는 결국 이미지의 세계이다. 여기서 이미지는 물리적으로 평면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像)을 말한다. 일상에서 가져온 이 사물과 이미지는 누군가에게 어딘가 익숙한 형태의 파편으로 존재하지만 정지현에게 일상적인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정지현은 익숙한 출처를 가진 재료를 자르고 가공하고 편집하여 이미지를 구성한다. 이 구성은, 앞에서 언급한 그의 작업 <바위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연한 예측의 흐름을 방해하고 배신하면서 이미지를 이루는 재료, 즉 파편 자체를 보게 한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정지현이 이미지를 만드는 목적일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는 “실재하는 것에 관한 사유실재하는 것 그 자체에 관계가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것은 지식의 관계, 즉, 지식의 적절성 또는 부적절성의 관계이지 실재하는 관계가 아니다. 실재하는 관계란 그 실재하는 것에 내재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사유는 그 실재하는 것에 관한 (적절한 또는 부적절한)지식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정지현의 사물에 대한 철학을 일부 대변해 주는 것 같다. 정지현은 지식 체계 안에서 형을 분류하고 정의할 수 있는 관계나 근거를 규명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 사물 그 자체의 형의 문제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실재하는 것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지현에게 사물에 대한 첨예한 감각을 고민하는 일은 명확하게 눈 앞에 있고 손에 잡히는 것이지만 일순간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고민이 된다.

 

재작년 이맘 때 쯤인가 정지현과 나눈 대화에서 그는 이 사회에서 미술가로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을 말하다 그가 당시 읽고 있던 사회학자 김홍중의 글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홍중에 의하면 파상(破像)의 시대는 더이상 긍정적인 상상을 발전시키는 것이 무의미해진 시대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우리가 기댈 수 있는 힘이 있는데 우리가 사는 현실과 무의식 사이에 내재된 환멸을 있는 그대로 겪어내는 힘, 그리고 희망의 실마리를 그 파편들 속에서 찾아내려는 자세가 바로 파상의 힘이다. 과거에 예술이 상상하던 유토피아가 허무하게 사라졌음을, 의존할 수 있는 사회적인 토대가 무너져버렸음을 믿어버린 사람에게는 그 위에 덧붙여 구축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환멸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이미 깨져버린 상을 주워 담아 다시 조합하고 거기에서 우발적으로 생기는 가능성을 기대하며, 삶을 희망하는 자기만의 싸움을 지속할 수는 있다. 이런 실천에 자신의 직업이 맞닿아 있는 미술가 정지현에게는 결국 사물의 형태와 그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사회 안에서 적극적으로 존재하는 방법이 된다. 그래서 정지현에게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는 그 생산된 이미지가 언젠가 사라져 버릴, 경제적 쓸모를 갖지 않은 상(像)에 불과할 지언정 그의 실존을 반증한다. 기존에 알고 믿었던 것, 당연했던 것을 의심하게 하는 이미지의 힘은 결국 정지현이 앞으로도 계속 ’만드는 행위‘를 하도록 추동하는 결정적인 기반일 것이라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