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hyun Jung

<다목적 헨리> / 이 세상은 파괴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_ 김윤경

김윤경(아뜰리에 에르메스 큐레이터)

-<다목적 헨리> 전시서문

잠시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어보자. 서울의 도심, 서울 주변 신도시의 흔히 지나쳐 다니는 거리 곳곳에서 마주쳤던 풍경들을 떠올려보자. 무엇이 떠오르는가? 하늘 높이 솟아오른 고층 건물들의 입구에,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던 공원의 한가운데에, 교통이 정체된 도심의 차 안에서 내다본 대로변에 자리잡고 있던 것들이 떠오르는가? 이런 곳에는 어김없이 조형물이 자리잡고 있다. 서울의 중심인 세종대로 사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충무공이순신장군상[1]과 청계광장에 세워진 스프링[2]은 웅장한 스케일로 도심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실상 그 장소를 떠올릴 때 대다수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 존재감은 그리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다. 하물며, 특별한 형태도, 엄청난 규모도, 눈에 잘 띄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도 않은 수많은 조형물들은 사람들에게 인지되지조차 않기에, 조형물들은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의미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공공조각’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조형물들은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우리의 삶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도심의 공공장소에서 보여질 것을 전제로 구상되고 실현된 예술행위를 총칭하는 이 조형물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놓여진 장소의 특정한 의미를 그와 관련된 형상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특정 사건이나 특정 인물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기능을 담당해온 ‘기념물’이라는 조각의 분야와 그 기원을 공유한다. 지배 권력의 기억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던 이러한 기념의 기능은 근대 이후에는 점차 약화되었고, 모더니즘의 어휘는 조형물의 (형태적, 내용적) 추상화를 가속화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도심의 공간들을 차지하고 있는 대다수 조형물들은 전통적인 기념물과 추상화된 장식품의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해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형물들은 도심의 한가운데를 점유하고 있지만, 도시민의 시선과 관심 밖으로 밀려나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한다.

 

이렇듯 현대의 도시에서 애매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공공조형물이지만, 정지현에게는 ‘조각’이라는 형식에 대해 계속적인 질문을 떠오르게 하는 대상이 된다. 전시의 제목인 다목적 헨리에 등장하는 ‘헨리’는 영국 출신의 대표적인 현대 조각가 헨리 무어(1898-1986)에서 따온 것으로, 이것은, 글자 그대로, 도심 곳곳에서 다양한 맥락에 등장하는 현대 조각 거장들의 작풍(作風)[3]을 본뜬 조형물과 그 부산물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어떤 감정을 함축하고 있다.

 

도심에서 발견되는 조형물은 거칠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정부나 기관 주도로 건립된 위인 및 순국선열의 동상들과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4]의 시행으로 건축물 앞에 세워진 조형물들이 그것이다.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전자의 경우가 정부표준영정(政府標準影幀)[5]이나 기록물을 참조하고 기념물의 전통과 전형(典型)을 따라 대체로 사실적인 재현에 기반하여 제작되었다면, 후자의 경우는 건축물이나 주변 경관과의 조형적인 조화를 고려한 모더니스트 (추상) 조각이 주류를 이룬다. 두 부류의 조형물은 제각기 설치 의도와 목적은 다르지만,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의 장소를 점유하고 있기에 공공성에 근거한 미감(美感)과 미학적 기준을 일정 부분 공유하고 있다.[6] 정지현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바로 공공조형물들이 공유하는 이러한 독특한 미감이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본 듯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그 미감을 덧입은 도시의 표면에서 정지현은 자신이 마주한 현실의 이면을 고스란히 읽어낸다.

 

애초의 의도와 목적을 상실하고 현대 사회의 부산물이나 폐기물처럼 도시의 구석구석에 방치되고 유기되어 발견되는 수많은 공공조형물들로부터 출발한 정지현의 의심과 질문은 예술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서로 다른 시선들의 차이를 드러내고, 이것은 다시 동시대 현실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서로 다른 감각과 취향, 신념의 끝없는 어긋남을 가시화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공공의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조형물이 다수의 미감을 반영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개개인의 존재를 외면하고 제도라는 권위를 뒤집어쓴 전체주의의 표상일 뿐이며, 결국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허구로 전락하는 지점에서 정지현은 오늘의 현실을 포착해낸다. 진짜를 가장한 가짜들로 가득한 현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가 여전히 현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 이것은 진짜도 가짜도 아니며, 과거도 현재도 아니다. 진짜의 내부에 존재하는 가짜이며, 현재의 내부에 존재하는 과거다. 그리하여 진짜의 연속성을 파괴하고 현재의 연속성을 파괴함으로써, 진짜를 진짜가 아니게 하고 현재를 현재가 아니게 한다. 이 혼돈과 겹침의 지점, 그 잉여의 지점을 정지현은 주목한다.

 

현대인의 삶이 파생시킨 온갖 부산물과 폐기물들은 지나가버린 도시의 과거이지만 여전히 현재 도시의 풍경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풍경의 표면과 그 이면에 예민하게 감응하며 정지현은 도시의 삶이 파생시킨 부산물과 폐기물의 (이제는 그 출처마저 모호해진) 파편들을 수집하고 해체하고 이것을 다시 재조합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버려진 광고판이나 구조물들은 해체와 재조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와 쓰임을 부여받고, 쓸모가 다한 전자 제품이나 일상용품은 그 형태를 간직한 채 (혹은 유령처럼 껍데기만 남아) 또 다른 전체의 일부로 결합된다. 이리저리 뒤섞여 부유하듯 존재하는 이상한 것들, ‘미술’이라고 규정되지 않았던 것들, 그래서 마치 가짜인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것들은 어떤 논리적인 인과 관계에 의해 도출된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사건, 불가해한 것에 대한 사유의 결과로, 전시장은 이런 것들이 그저 가득 놓여 있는 임시적인 어떤 상태일 뿐이다.

 

정지현은 여기에 하나의 층위를 더한다. 건물 입구 한 귀퉁이에, 건물 뒤편 후미진 곳에 방치되고 유기되어 보이지 않는,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도시민의 삶과 기억으로부터 배제되어 존재하지 않는 공공조형물들의 일부분을 유토(油土)로 옮겨와 다른 수집물들과 재조합하거나, 알루미늄 망을 사용해 순간적으로 형태를 잡아내고 이것으로 임시적이고 가변적인 형상으로 가설(假設)한 것들이 그것이다. 정지현이 전시장으로 끌어들인 온갖 부산물과 폐기물들이 그렇듯이, 방치되고 잊혀진 공공조형물 역시 현재의 연속성을 파괴하는 과거의 흔적이다. 이렇듯 남겨진 과거의 흔적을 해체하고 그 파편을 전혀 다른 맥락으로 가져와 서로 다른 출처로부터 그러모은 온갖 파편들과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사물들이 가진 원본의 질서는 교란되고 정지현의 방식대로 번복된다.

 

진짜를 가장한 가짜들로 가득한 현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가 여전히 현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 그래서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불명확한 이 세계에서 정지현은 이렇게 자신의 작은 제스처로 이 세계의 표면에 균열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정지현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진짜이며 현재인) 물리적 현실인 작가 ‘자신의 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는 세계, 과거가 현재를 잠식하는 세계로부터 파편들을 그러모으고 이것을 다시 재조합하는 과정은 고정적인 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기존의 체계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계를 창조하고 이를 확고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정지현의 ‘손’은 새로운 질서 속에 안정적으로 고정되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능한,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상태를 매순간 모색한다. 그리하여 전시장에는 도시와 삶의 공간으로부터 촉발된 불온한 시도를 통해 모색한 또 다른 질서의 어떤 가능성들이 펼쳐진다.

 

이렇게 전시장에는 ‘지금’,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닌 것들이 여전히 ‘지금’의 ‘여기’를 점유하고 있는 풍경들, 관습과 제도에 의해 공고하게 ‘지금’, ‘여기’에 고착되어 어긋나고 비틀어진 현실을 구성하고 있던 파편들을 해체하고 수집하고 재조합해가는 과정들이 여전히 지난하게 펼쳐지고 있다.[7] 결국, 전시 다목적 헨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터넷 (이후) 세대가 경험하는 기성/기존 세계-체제-제도와의 간극-불일치-틈-불화를 물리적인 현실인 자신의 손(수공)에 의지해 화해해가려는 고된 시도의 결과물이며, 획일화되어 익숙해졌던 표피에 감춰져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새삼 가시화시키는 과정이 아닐까? 자, 이제 질문을 던져보자. 여전히, 이 세상은 파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1] 1968년 4월 27일에 당시 세종네거리 제1녹지대에 건립된 충무공 조상은 박정희 대통령이 기금을 헌납했고 친필로 ‘충무공이순신장군상’이라고 새겼다. 전체 높이 17m로 당시 동양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2] 2006년 9월 29일에 준공된 스프링은 클래스 올덴버그(b.1929)와 코샤 밴 브룽겐(1942-2009)의 공동 작업이다. 높이 20m에 이르는 이 조형물의 설치에는 당시 34억원 정도가 투입되었고, KT가 기부 형식으로 이 제작비 전액을 부담했다. 스프링의 설치를 둘러싸고 미술계에서는 공공미술의 공공성과 문화 사대주의, 일방적 관료주의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3] 여기에서 언급된 ‘현대 조각 거장들의 작풍’은 헨리 무어로 대표되는 유기적 추상 조각의 흐름을 일괄하며, 주로 전통적인 인체의 형상을 단순화하고 추상화하여 유기체에 대한 은유로서의 덩어리로 제시된 조형물을 총칭한다.

 

[4]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을 건축하려는 자에게 건축 비용의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회화, 조각, 공예 등 미술작품의 설치에 사용하게 하는 제도이다.

 

[5] 역사적 위인들의 영정과 동상의 형식을 통일하고자 국가 주도하에 그려진 초상화들로, 모든 정부표준영정은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훈령으로 지정된 ‘영정/동상 심의 규정’에 따른 심의 절차에 따라 지정되거나 해제된다.

 

[6] ‘공공성에 근거한 미감과 미학적 기준’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지만, 개인적인 의견임을 굳이 밝히고 부연하자면, ‘선플(호평)도 악플(비난)도 아닌 무플(무관심)을 지향하는 감각과 기준’ 정도로 갈음할 수 있겠다.

[7] 전시장의 풍경은 그 자체로 어떤 가능성의 상태이므로, 관람자 개개인의 개별적인 감각과 만나 매번 또 다른 풍경으로 번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