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hyun Jung

<가우지> / 보이지 않는 조각 _ 윤원화

많은 조각품이 한데 모인 광경에 울렁거림을 느낄 때가 있다. 개별 작품들이 충분한 거리를 두고 조화롭게 배치된 것이 아니라 몸을 맞대고 살짝 엉긴다. 그렇지만 한 덩어리의 살로 뭉쳐지지는 않고, 서로의 유사성과 차이 속에서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힘이 체계적인 사물의 질서로 귀결되지 않는 모호한 상태를 지속시킨다. 정지현은 이렇게 웅성거리는 조각적 모임을 조성한다. 그의 전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물품들이 밀집한 조각 애호가의 정원 같기도 하고 폐기물과 재활용품이 뒤섞인 고물상 같기도 하다. 이렇게 모으지 않았으면 죄다 버려졌을 물건이라는 한 수집가의 말이 떠오른다. 조각은 창조되는 것일까, 발견되는 것일까, 아니면 선언되는 것일까? 정해진 답이 없기에 조각은 종결되지 않는다. 정지현의 조각은 물체들이 변형되고 이동하고 재정의되는 과정에서 살아 움직인다. 그것은 자율적인 운동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몸들이 서로를 누르고 밀어 올리는 연쇄적이고 집단적인 활동이다.

<가우지>는 정지현이 3년 만에 선보이는 개인전이지만 마치 단체전처럼 보인다. 작가는 시간의 틈새에 불시착한 과거의 박물학자 또는 미래의 고고학자처럼 파편화된 물건들을 수집하고 본뜨고 재배치하는데, 거기에 자신의 인장 또는 서명을 남기는 대신 이질적인 힘들의 흔적을 부각한다. <공원> 연작이 표준화된 건축 자재의 관습적인 배열 속에서 자본과 기술의 비인격적인 힘을 암시한다면, <매립지와 갯벌>은 그런 인공적 질서와 중첩된 자연의 생화학적이고 물리적인 힘을 드러낸다. 하지만 전시작들은 이런 힘들이 넘실거리는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하기보다 그 힘이 지나간 후의 적막함을 끌어안는다. 전시장 입구에서 관람자를 맞이하는 <스웹(무거운)>과 <스웹(가벼운)>은 뭔지 모를 잔해 같은 것을 상이한 재료와 기법으로 본뜬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봐도 이들이 원래 무엇이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모양이 되었는지, 실제로 얼마나 무겁고 또 가벼운지 알 길이 없다. 사물들은 여기 없는 무언가의 희미한 자취로 남아 있다. 이들의 잔여적 존재는 전시장을 자유로운 조형을 위한 투명한 공간이 아니라 이유도 모른 채 파헤쳐지고 방치된 공백으로 변모시킨다.

원래 ‘가우지’는 나무에 홈을 파는 둥근 끌을 뜻하지만 ‘후벼 판다’는 뜻도 있고 특히 ‘눈알을 도려낸다’는 표현에 많이 쓰인다. 정지현의 작업에는 눈에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겉면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이 있다. 겉면은 제작에서 폐기에 이르는 인공물의 생애주기와 그에 작용하는 힘을 비가시화하면서 신제품이 출시되는 가장 빛나는 순간에 영원히 머물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작가의 지난 전시들은 이런 허상이 구체화되는 국면에 머물렀다. <곰염섬>(두산갤러리, 2016)은 전시를 떠받치는 동시에 그에 의해 가려지는 뒷면의 시공간을 연극적으로 개방했고, <다목적 헨리>(아뜰리에 에르메스, 2019)는 도시 경관을 이루는 사물들의 허술한 구조를 연구하면서 엇비슷하게 양산되는 공공 조각의 외양을 부분적으로 본떴다. 앞의 두 전시가 가시적 세계의 허물을 벗긴 듯한 풍경을 구성했다면, <가우지>는 그런 허물을 짊어지고 이어 달리는 몸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바통을 주고받듯이 하나의 몸에서 또 다른 몸으로 형상이 옮겨가는 움직임의 연쇄가 있다. 몸을 주물러 빚고 무늬를 새기는 일이 마냥 다정할 수는 없다. 전시는 불완전한 질료이자 유한한 힘의 매개체로서 소모되는 몸들을 숨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선정적인 폭력의 현장으로 조명하지도 않는다. 전시장의 몸들은 가시성의 껍질을 벗겨낸 것처럼 잘 보이지 않는 상태로 그저 잠시 멈추어 있다.

여기서 해야 할 일은 집요하게 관찰하여 볼거리를 찾아내는 것도 아니고, 직관적인 감식안을 가동하여 작품을 판정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숲에서 나무를 끌어안듯이 전시물과 교감하는 것도 아니다. 조각 전시를 보는 일은 구체적인 몸들의 모임에 합류하여 그들 사이의 규약을 파악하고 각자의 기억을 나누는 사교적 행위를 수반한다. 그것은 정말로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전시장에는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이 상영되는데, 스크린 앞에 설치된 의자는 <네 이웃의 벤치>라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된 것이다. 작가는 팬데믹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어려워졌을 때 가상 공간에서 벤치를 만들어 보는 디자인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를 물리적으로 출력한 결과는 그렇게 안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의자 상판을 손으로 눌러 보고 조심스럽게 무게를 싣는 관람자의 움직임은 VR기기를 손에 쥐고 허공 속에서 무엇이 될지 모르는 형상을 주무르는 워크숍 참여자의 몸짓과 호응한다. 정지현의 조각은 눈에 보이는 한순간에 갇히지 않기 위해 이미지의 평면을 초과하여 고유한 공간과 시간을 형성하는 몸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하나의 몸이 또 다른 몸의 그림자를 실어나르는 연쇄 속에서 우리는 수수께끼를 나눠 가진다.

작가는 자신이 마주친 몸의 그림자를 꿰매고 살을 채워 또 다른 몸들의 행렬을 빚는다. 한물간 지자체 마스코트에 알루미늄 망을 대고 눌러서 형상을 본뜨고 우레탄 폼을 채운 <해치> 연작은 원래의 매끈한 윤곽과 알록달록한 색깔을 잃은 대신 데굴데굴 구르는 볼링공 같은 운동감을 얻었다. 해치는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복제, 변형될 수 있는 시각적 상징이지만, 지자체의 관료적 질서와 관광업의 변덕스러운 유행 사이에서 일종의 사회적 삶을 획득했다. 많은 이들이 말하듯이 이미지는 물질과 마찬가지로 모습을 바꿀 뿐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태어나고 죽는 것들이 있다. 전통적으로 조각은 유한성의 극복을 꿈꾸지만 그 불완전한 몸은 종종 불가능한 영원의 알레고리로 변모한다.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은 해치의 둥근 눈알은 보이지 않는 현재의 바깥을 향한다. 가벼워 보이나 실제로 짊어져 보면 또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을 잠정적인 몸을 입고 해치는 웃고 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한번 따라 웃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