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hyun Jung

<행도그> 저 창문 밖 지붕 위의 새 _ 안소연

저 창문 밖 지붕 위의 새

《정지현: 행도그 Hangdog》

아트선재센터 2023.11.3-2024.1.21

안소연

미술비평가

 

#1 광장에는 15세기 왕의 동상과 16세기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바위를 깎아서 만든 전설 속의 짐승 한 쌍이 광장 끝에 세워져 있고, 손으로 만지기 좋게 인형처럼 표면이 매끈한 조형물도 가끔 길목에서 마주친다. 공연장이 있는 오래된 현대식 건축물 앞에는 추상적인 현대 조각이 고상하게 자리하고, 그 앞으로 차들이 다니며, 사람들이 줄 지어 걷는다. 아이들이 광장을 가로질러 뛰어 다니고, 벤치에 기대어 앉은 사람들은 간혹 조각 같다. 계절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남자가 목적 없는 걸음을 걷고, 한 여자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에 종이를 나누어 준다. 세월을 알 수 없는 큰 고목이 빛과 바람에 반짝이고, 어디에서 날아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둘기는 허공에 잿빛 그림자를 드리운다. 광장은 몹시 시끄럽고, 길게 늘어진 침묵처럼 지루하다.

 

#2 전경: 평평한 목조 마루 위에는 땅의 중력으로부터 자리잡은 임의의 형상들이 펼쳐 있다. (아무도 본 적 없고 결코 가서 닿을 수 없는) 먼 거리의 힘에 직접 맞서, 지금 나의 두 발이 서 있는 방식으로 한 자리를 차지한다. 땅 위에 펼쳐진 형상들 가운데 바위처럼 회색의 넓은 표면적을 스스로 내세우고 있는 두 개의 형상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크기 때문이었을 테지만, 육중한 무게를 증명해 보이려는 색도 의심스럽다. 윤곽선, 그것이 가리키는 어떤 닮음의 모양을 그 순간에 알아차렸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회색의 크고 무거운 형상, 그것은 바위이든가, 받침대 위로 옮겨진 조각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빛이었는데, 삼차원 공간의 양감을 깨우쳐 주는 빛이 스스로 어떤 형상을 자처하며 (중력에 맞서) 천장에 매달려 있거나 바닥에 서 있었다. 둘은, 서로 다른 모순을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어떤 형상의 현전에 대해 증명하려는 강한 애착의 신호를 보냈다. 이를테면, 두께가 제거된 바위의 표면이 제 형태를 재정의하는 방식과 대상의 윤곽을 비추는 빛의 인공적인 형태를 의인화 하는 수사로 말이다.

 

-무게를 갖지 않는 빛이 사물과 결합하여 두께를 지닌 조각이 되는 방식.

-제 존재를 증명하는 틀과 결합해 사물 이상의 (조각적인) 현존에 다가갔다가 동시에 그 윤곽을 끊임없이 상쇄시키려는 역설까지 포함한 (비물질적인) 자기 자신으로의 회귀.

 

아주 서서히 일련의 형상들이 제각각 드러내는 (삼차원적) 방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등지고 정면을 향해 서 있는 형태, 가장 큰 윤곽선과 가장 넓은 면을 내세우며 사선으로 누워 있는 형태, 불완전한 윤곽을 감추듯 벽의 모서리를 향해 절단된 면을 비스듬히 돌려 놓은 형태, 어떤 힘에 의해 허공에 일시적인 움직임을 만들다 사라지는 우연한 형태, 이 모든 것들이 광장에 세워진 이질적인 형상들처럼 각각의 시대[시간]와 장소[공간]를 함의한 수수께끼 같은 방향에 대해 환기시킨다.

 

색, 대체로 무채색 계열의 형상들은 어딘가 닮아 보였다. 살 덩어리처럼 단색의 몸통을 한껏 드러내 보이는 각각의 형상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자들의 유령 같다. 그것이 아마도 이 형상들을 광장의 조각(적 형태)처럼 보이게 하는 이유 중 하나일 테다. 단일한 색이 환기시키는 단일한 형태의 독립성은 인간 형상에 근원을 둔 조각의 ‘초능력(mana)’에 대한 믿음과 연결된다.

 

#3 단번에 중력과 빛과 방향과 색에 관한 삼차원적 현전을 시사하며 평평한 마루 바닥에 밀착해 있는 이 조각적 형상들은, 조금 더 비약적인 조각적 상상으로 장면을 전환시킨다. 어딘가에 있(었)을 이 형상들의 원형에 대한 상상은, 문득 지금 눈 앞에 펼쳐있는 실체의 불확실성을 환기시키면서 보다 오래된 먼 과거와 조우할 시공간의 전환을 시도한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 어느 시공간에서, 오늘, 이 순간의 경험처럼. 기억을 지닌/잃어버린 어떤 형태로 갑자기 나타날 지도 모를 일이다.

 

#4 원형: 조각은 태생적으로 모순을 지닌다. 그것은 수없이 원형을 모사하면서, 결코 원형과 동일한 것이 되지 못한 채, 제 스스로 (상실을 지닌) 또 다른 원형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인간 형상의 유전적 탄생[생성]과 죽음[소멸] 안에 함의된 ‘원형’으로부터의 분리와 상실을 떠올려 보면, 이 모순은 조각의 자기 증명인 셈이다.

 

정지현은 어떤 내막을 독백처럼 묻어두고, 각기 다른 시대의 묘비가 즐비하게 세워진 것 같은 공원의 풍경을 가져다 놓았다. 그것은 다른 말로 광장이라 불러도 상관없을 것 같다.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영화 <세자레(Césarée)>(1979)에서 처음과 끝을 되풀이 하듯 연속하여 채우고 있는 광장의 조각들은 거대한 인간의 역사와 개인의 상실을 동시에 아우르는 모순을 마다하지 않은 채 현재의 풍경 속에서 지속적으로 갱신된다. 정지현이 풀어놓은 조각의 풍경은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뒤라스가 찍은 광장의 조각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 시대착오적인 형상들이 어떤 신체, 어떤 사물, 어떤 건축, 어떤 장소, 어떤 움직임, 그리고 어떤 서사들과 겹쳐지면서 우연히 드러내는 삼차원적 현존의 실체를 목격하는 몸에 대하여 자각하게 했다. 조각가의 것으로 여겨졌던 그 육체적 경험은, 공원과 광장에서 조각(적인 것)을 발견하는 인간 형상에 대한 근원적인 향수와 연결된다.

 

#5 수수께끼: 아주 우연히, 아무 상관 없는 일들이 하나의 시공간을 점유하게 됐다. 그 사건은 정지현과 나, 각자에게 비밀스러운 일처럼 따로 일어났다. “창문 밖 건너편 지붕 위의 형상”이라는 정황을 대화의 시차 속에 주고 받으면서, 그것이 어쩌면 같은 내막을 안고 있는 서로 다른 존재일 지도 모른다는 것을 누가 먼저 알아차릴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최후의 월디>(2022)는, 수상하게 늘어진 팔다리로 끝없이 제 원형으로부터 멀어진 로댕의 <아담>(1880-1881)을 떠올리게 했다. 짧은 팔다리에 비해 과도하게 긴 두 개의 귀를 가진/가졌던 월디는, 알루미늄 망과 우레탄 폼을 이용한 열화된 복제의 과정과 받침대 위에 올라가 직립하기 위한 설치의 과정을 겪으며 스스로 진화하듯 제 귀를 떨어뜨려 오른손과 결합한 제3의 지지체를 획득했다. 로댕의 <아담>은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1511) 속 신의 손과 똑 닮은 오른손을 가졌다. 중력에 붙들려 곧 주저앉을 것만 같은 아담의 길게 늘어진 목과 팔과 다리를 수직으로 일으켜 붙들고 있는 오른손의 위력처럼, <최후의 월디>는 소멸되어 가는 제 형체의 윤곽에서 “분리된” 파편을 한 손에 (간신히) 붙잡아, 다시금 원형에 대한 (불확실한) 기억을 간직한 상실과 부재의 표상으로서 “거기 서 있다.”

 

노란색 우레탄 폼의 허술한 양감을 가진 월디(의 열화된 복제품)는/은 큰 창문을 향해 공간 내부를 등지고 서 있었다. 단순한 윤곽마저 흐릿해진 이 복제품은 건너편 지붕 위의 노란 형상과 마주한 채, 저 커다란 구 모양의 정체 모를 실체에 수수께끼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정지현이 (자신도 몰랐던) 이 수상한 둘 사이의 정황에 관해 빈 말처럼 내게 말해주었을 때, 그는 내가 어쩌면 그 둘에 대한 진지한 믿음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 믿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그가 가리켰던) 저 건너편 지붕 위의 노란색 구를 보자마자, 나는 뒤라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로드리고”라는 남자를 떠올렸다. 하루 종일 강한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여름 날, 사람[아내]을 죽이고 지붕 위에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숨어 있던 로드리고를 폭우와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알아차린 마리아의 시선에 압도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날 마리아가 호텔 창가에 서서 건너편 지붕 위 굴뚝 옆에 갈색 담요를 뒤집어 쓰고 “죽은 형체”처럼 웅크려 있던 로드리고를 알아차린 것은, 그리고 그를 지붕에서 끌어내려 구출/구원해준 사건과, 그가 밀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잠든 것처럼 엎드려 있던 것을 마리아가 다시 찾아낸 비극적인 정황 마저도, 상실한 인간 원형에 대한 (권태로부터의) 갈구 때문이었을 테다.

 

한동안 나는 그것을 (수수께끼 같은) 조각적 인식의 사건으로 기억해 두려 했다. 그리고 <최후의 월디>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저 창문 밖 지붕 위의 노란 구에 대해 그가 말했을 때, 나는 이 두 개의 사건이 매우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또한, 어느 새벽녘에 건너편 건물 꼭대기에서 검은 실루엣으로 목격된 “새의 형체”가 나에게 조각적 상상의 이미지로 갑작스럽게 다가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수께끼처럼 원형을 숨기고 있는 저 창문 밖 지붕 위의 새-로드리고-노란 구에 대한 알아차림….

 

#6 못다 한 말: 정지현의 오래된 작업 중에는 <못다 한 말>(2009)이 있다. 그는 개구멍처럼 천장의 한쪽 석고보드를 뜯어내 (집에 대한 상징적 구조로서) 지붕 아래 감춰진 여분의 위치에 누군가가 “잡다한” 조각품들을 만들어서 펼쳐 놓은 진풍경을 보게 했다. 말하자면, 지붕과 가까운 천장 석고보드 위에 기이한 조각 공원 같은 평평한 풍경을 눈앞에 펼친 셈이다.

 

조각의 받침대로서, 그는 상실을 유보함으로써 원형을 갈구하는 조각적 형태들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폭우와 어둠 속에서, 마리아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로드리고의 실체를 갈색 담요로 덮인 죽음의 형체로 서서히 알아볼 수 있었던 바로 그 지붕처럼 말이다. 단 한 사람만이 천장 가까이 다가가서 깊은 어둠을 뚫고 어떤 형상에 시각적으로 이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머리를 집어 넣어야 할 작은 틈새는, 목조 마루 바닥 위에 그럴 듯 하게 꾸려진 조각 공원의 수수께끼로 향하는 비밀의 문 같다. 그때는 못다 했던 말.

 

#7 외피와 뼈대: 《행도그》에서는 조각적 인식의 대구를 이루는 개별적인 요소들이 서로를 반영하며 신랄한 비평적 관계를 다지면서 긴장과 유보의 상태를 보인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공원>(2022)과 절개된 외피로만 구축된 <멀리서 온 토르소>(2022)는 서로 아무 상관없는 존재인 것처럼 무심해 보이지만, 각자에게 결핍되어 있는 외피와 뼈대에 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게 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정지현은 공원에서 주워 온 철재 파이프와 나무 막대 등을 단순하게 결합시켜 유기체적인 상상을 불러오는 임의의 형상들을 만들어 <공원>이라 이름 붙였다. 양감이 결핍된 아상블라주 구조의 선재 조각은, 공원의 표지판이나 울타리 기능을 하는 사물로 의심 받다가 조형적 형태의 뼈대를 구축하는 조각의 내적 원리로서 자립한다. 《행도그》에서 <공원>은 공간을 물리적으로 구획하거나 인체의 동선을 이끄는 기호로 작용하면서, 동시에 양감을 모조리 덜어낸 삼차원적 실체의 내부 구조로서 시지각의 경험을 한층 배가시킨다.

 

(나만의 상상과 추리를 섞어 보자면,) <멀리서 온 토르소>는 <공원>으로부터 어떤 단서들을 가져와 제 형태의 성립을 증명할 수도 있다. 정지현은 누군가가 직접 조각의 표면을 3D 스캔한 데이터를 구해, 약 20MB 크기의 무게와 두께도 없는 스캐닝 데이터를 삼차원의 입체로 분할 출력했다. 이 자료의 실제 삼차원 “원형”은 마이욜(Aristide Maillol)의 <강(La Rivière)>(1938)으로, 프랑스 파리의 한 조각 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이 조각은 뒤라스의 영화 <세자레>에도 등장한다.) 작가 사후에 납으로 캐스팅 된 이 와상은 다음 세기의 누군가에 의해 비물질 데이터로 다시 한번 캐스팅 되었다가, 정지현이 전송 받아 새로운 형태의 주물로 재탄생한 셈이 됐다. <강>의 원형 속에 굳건히 자리했던 (형태의 중심축으로서의) 뼈대는 몇 차례의 복제의 과정을 거치면서 불필요한 것으로 차츰 “망각”되었고, 외피만 남겨진 채 익명의 (뼈대 없는) 인체의 흔적을 간직한 토르소로 간신히 분류될 수 있었을 테다.

 

<멀리서 온 토르소>는 스스로 토르소의 조건을 벗어나 있다. <공원>과 마찬가지로 토르소가 절단된 머리, 팔, 다리에 대한 원형을 기억해내기 위해서, 그것은 반드시 형태의 중심축을 내부에 지켜내야 한다. 척추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토르소에 대한 개념을 비트는 <멀리서 온 토르소>의 정체는, 내부가 비었다는 사실이 가져다 주는 상실감이다. 팔과 다리의 절단면은 텅 비어 있고, 이 껍데기에 불과한 인체의 파편들에는 원형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다.

 

#8 묘비: <스퀘어>처럼 수수께끼 같은 조각이 또 있을까. 사각의 평평한 받침대 위를 밝은 조명이 비추고 작은 기계 장치에서는 규칙적으로 안개가 만들어져 나온다. 허공에 떠 있는 구름 한 조각처럼 (가짜) 양감을 자랑하는 이 형상은 광장 위에 세워진 숱한 이미지들과 교차하다가, 보이지 않는 대기의 움직임에 이끌려 서서히 빛과 멀어지면서 유령 같은 모습으로 곳곳을 나른하게 배회한다. 광장은 죽은 사람들의 묘비가 복잡한 시간을 뭉쳐놓은 것처럼 소란스럽고 지루한 묘지 같다.

 

원형으로부터 멀어진, 하지만 결핍과 상실의 기억을 떠안은, 마땅히 적합한 장소가 있다면 광장과 묘지일 것이라 생각하는, 그게 나한테는 조각이다. 여름 밤 폭풍우 속에서 지붕 위에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있던 사람에게서 그가 바로 “그”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소설 속의 사건처럼, 불완전한 조각의 잔해들 속에서 “상실한 원형”으로서의 “그것”을 알아차리는 상상적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시공간의 비약적 격차 속에서 더욱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