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hyun Jung

<도운브레익스,서울> / 모험의 시간 _ 김해주

김해주 | 독립큐레이터

전시는 몇 주에서 몇 달까지 긴 시간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관객들은 그 시간의 총량을 의식하지 않는다. 전시의 경험은 각자가 그곳을 찾아가서 본 만큼의 시간으로 결정된다. 날씨처럼 매일 바뀌는 것이 아닌 전시의 시각적 경험은 그 기간 중 언제가 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예상하기 때문이다. 이주요, 정지현 작가가 함께 만든 〈도운 브레익스, 서울〉에서 전시를 경험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여기서 전시는 작품의 종착지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고 살아가는 생애의 한 기간에 속할 뿐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이처럼 작품 각자의 맥박이 느껴지는 이유는 먼저 그 형태와 배치된 방식에 있다. 전시장 곳곳에 놓인 사물들은 안정된 위치를 점하고 있기보다는 터미널에서 대기하고 있는 승객들처럼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퀴가 달린 것은 물론, 목재와 가는 철재 등의 재료로 만든 것들도 그 크기에 관계없이 운동성을 드러낸다. 공간 안에 점점이 흩뿌려진 수많은 사물과 장치, 드로잉은 그 사이사이로 여러 길을 내고 있고, 보는 이의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풍경과 형태를 드러낸다. 그 배열에 따라 관객도 여러 동선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대기 상태의 사물들은 정지해 있어도 움직임을 품는다. 구름처럼 떠 있는 이 움직임의 전조가 작품이 갖고 있는 시간성을 지시한다.
전시가 작품 생애의 한 단면임을 느끼게 하는 또 다른 지점은 실제 전시 안에 다양한 활동들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전시 기간 내에 세 가지의 서로 다른 퍼포먼스가 예정되어 있는데, 이 퍼포먼스의 시간에만 작품들이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시간에도 작품들을 둘러싼 일들이 일어난다. 두 작가는 전시장 한켠에 커튼을 치고 작업장을 마련해 놓고 그곳에서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동시에 사물과 장치를 새롭게 만들기도 한다. 이는 완성된 전시의 보완이나 변형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전시를 그 자체로 생성되거나 생활하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분류와 분리의 원칙, 매끈하고 깔끔한 외관, 완벽성, 관객들을 안내하는 방식 등 전시라는 매체가 쌓아 온 일반적인 관습에서 벗어나거나 이를 의식하지 않는 형태들이다. 대신 성근 조합, 빗금, 교차선, 튀어나온 각목, 각을 맞추지 않은 요소들, 돌출 같은 배합과 구성의 감각이 드러난다. 이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전시를 유지시키는 것은 실을 잣는 것처럼 두 작가의 손끝에서 연속되는 만들기의 습관, 즉 형태와 이미지를 생성하는 즐거움이다. 사물들은 그 형태를 제시할 뿐 아니라 그 안에 각자의 이야기와 만들기의 연대기를 운반하며 뉴욕의 퀸즈 뮤지엄에서 광주비엔날레를 거쳐, 지금 아트선재에 머물고 있다.
이처럼 작품이 가진 시간을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영속성이 없는 사물, 결국은 부식되거나 부서질 물체임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장이나 보관을 위한 제도나 공간의 부족뿐 아니라 그 사물이 갖고 있는 필연적인 노화와 죽음에도 관련돼 있다. 이 전시는 곳곳에 극장과 연극의 요소들을 은유하고 있지만, 여기 놓인 사물들이 특히 배우와 겹치는 것은 그 부분이다. 결국은 둘 다 죽는 신체라는 것. 이곳이 극장이라면 이 무대에 백스테이지라는 개념은 없다. 주로 등장과 퇴장을 통해 만들어지는 장면의 시작과 끝은 맞붙어 있고, 막은 스스로 공간을 가르며 움직인다. 공연자와 관객의 구분선도 수시로 바뀌는 유동적인 것이 된다. 한편, 이 전시와 연계해 만들어지는 퍼포먼스는 여러 관계의 연결이기도 하다. 전시를 함께 만든 두 작가의 긴밀한 협업, 결코 각자의 소유를 내세우지 않는 전시 내에서 사물의 존재 방식, 그리고 퍼포먼스를 통해 기존의 작업들을 장치 삼아 결합하는 다른 작가(황수연, 이이내, 이혜인, 은재필, 정유진)의 작업과 맺는 관계, 그리고 이 신기한 사물과 행위로 채워진 공간을 경험하는 관객들과의 관계이다. 이 여러 층위의 관계 맺음이 결합하면서 전시는 동트기 전의 시간, 고정된 의미에 닻을 내리지 않는 모험의 시간을 만든다.